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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獻齋에 꽃피운 兄第會 
  
사천지역에 윗대의 직계 조상들을 모신 경주鄭氏 문헌공파 옥계공 종중의 후손들은 산업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됐다.

일제시대 때부터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 후손들은 6.25동란이후 사천 지역보다 특히 부산지역에서 생활터전을 잡은 경우가 많았다.

이러다보니 같은 혈통의 직계임에도 8촌 이상의 형제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윗대 조상을 모시는 제례의식도 직계로 내려온 장손 몫이었고, 그 밖의 후손들은 이같은 행사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시대 여건 역시 「조상에의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자신의 뿌리를 모르게 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현실적으로도 가까운 일가친척간에 왕래가 없어지는 마뜩잖음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늘 안타깝게 생각해오던 필자의 어머니(朴分伊)는 1970년대 초 70세손 형제들을 모으는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즉 부산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 70세손의 후손을 찾아가 (당시 군무원으로 있던 기철(基徹)조카 집이 아닌가 한다.) 70세손들이 하나의 계(契)를 구성토록 권유한 것이다.

당시 서울에 계셨던 어머니는 합천(陜川)의 숙모님을 불러올려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아들뻘인 69세손들은 나이도 많은데다 이같은 모임을 주선할 겨를이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던 이같은 권유를 계기로 부산지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던 70세손들은 서로를 찾아 하나의 모임을 갖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형제회(兄第會:회장. 有所)가 구성된 것이다.
어머니는 70세손들의 즉각적인 화답(和答)에 감격스러워 했었다.

형제회 회원들은 계열별로 내려오다 보니 위로는 40대에서 아래로는 갖난 아이(필자의 막내)에 이르기까지 연령차이가 심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30여명에 이르는 형제회 구성원들은 친목도모를 위해 때때로 가족모임을 갖는가 하면 사천지역에 모신 선조들의 시제(時祭)를 주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중에 관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 집안간의 대소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다른 씨족집단에서 보기 어려운 형제애를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형제회에 관한 세부적인 내력이나 하는 일들, 계획 같은 것에 대해서는 회원들이 보다 잘 알고 기록해 둘 것으로 믿어 여기서는 언급을 피한다.

분명한 것은 필자가 사천지역에 윗대 조상을 모신 후손들을 한 묶음으로 하여「사천문중」으로 자리매김한 주된 이유도 형제회가 큰 버팀목으로 작용한데 있다고 하겠다.

형제회 회원들 역시 언젠가는 조상으로 떠받쳐 질 것에 대비, 이같은 성격의 조직을 후손들에게도 물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산업사회를 살면서 자칫 멀어지기 쉬운 같은 항렬의 문중형제들이 결속 한다는 것은 자신뿐아니라 문중 발전에도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헌재(慶獻齋)에 관해 살펴보자. 
도시생활에 익숙한 형제회 회원들의 자손들은 제각(祭閣) 또는 재실(齋室)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여기에 부연해 둔다.이의 사전적 의미는 「묘 가까이에 있는 하나의 집으로 제례의식을 치루는 장소」로 돼있다.

전통가문의 집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이같은 제각을 세워 조상들을 흠모해 왔고최근에는 부유한 집안에서도 이를 건립, 가문의 위세를 내보이고 있다.

사천문중의 경우 사천지역에 터전을 잡은지 200여년이 지났지만 이같은 「제각」을 갖지 못해 그 후손들은 안타깝게 생각해온 적이 없지 않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연좌제에 따른 벌금형을 치른 이후 윗대의 선조들이 여기에까지 마음 쓸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사천문중의 경우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을 갖출 적에는 당해 조상의 묘소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제수물(祭需物)을 올리고 참배(參拜)를 했던 것이다.  

2000년 초 70세손의 기준(基俊)조카가 형제회 회원들과 의논,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 선영에 현재의 「제각」을 건립했다. 기준(基俊) 조카 혼자서 경비를 부담한 것이다. 감사한 마음 전해둔다.

제각의 이름은 경주鄭氏의 「慶」(경)에 문헌공파에서 따온「獻」(헌)을 붙여 「경헌재」(慶獻齋)라 했다.
경헌재 건립 이후부터는 여기에서 사천문중 윗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의식을 갖춤으로써 조상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후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덧붙여 경헌재가 있는 축동면 가산리 선영의 땅(4천여평)은 1970년대 초 필자(亨來)가 매입했던 것이다.
당시 이 선영의 땅은 국유지였으나 정부에서의 불하를 계기로 필자의 큰 형님(奭來) 이름으로 낙찰 받았던 것이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큰형수께서 세금이 부담스럽다며 필자 앞으로 명의변경 해줌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후대에서 보면 하나의 역사가 되겠기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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