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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파별 대표적인 인물

문헌공파(文獻公派):
  각 계파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첫 째 문헌공파는 시조의 42세손 진후(診厚: 검교첨의평리 극중의 맏아들)는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호부(戶部) 상서(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판군기사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偉)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戶部) 상서(尙書)와 수문전(修文殿) 태학사(太學士)를 거쳐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하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며  문헌공파의 파조(派祖)이다.

정헌대부로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내고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 때 길주(吉州) 목사(牧使)와 병부(兵部) 시랑(侍郞)을 역임한 맹장(猛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장군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武名)을 떨쳤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 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壇)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哭)을 했다.

이조(吏曹) 판서(判書) 염(廉)의 아들 지년(知年)은 1438년(세종 20)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을 거치면서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지냈으며, 단종(端宗)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文宗)의 수탁 고명신(受託顧命臣)으로서 단종이 손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종숙(從叔)인 홍덕(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효항(孝恒)은 성종(成宗)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및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했던 효상(孝常: 지년의 둘째 아들 효항의 아우)은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와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러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통덕랑(通德郞) 인필(仁弼)의 아들 지운(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 차례 전공을 세워 함흥(咸興) 판관(判官)에 제수(除授)되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思?)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에 절맥(節脈)을 세웠으며, 호조(戶曹) 참의(叅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순절하자 원한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兄) 원길(元吉)과 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로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良景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휘(暉)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훈공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충효양전(忠孝兩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때에 효(孝)를 버리고 충(忠)을 택했던 발(潑)은 부산진(釜山鎭) 첨사(僉事)로 나가면서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에 어머니 남궁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忠)속에 효(孝)가 들어있다면서 개념 말고 나라를 위하라고 타일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임진년에 왜군이 늑병(勒兵) 25만 명과 병선 4만 여 척을 거느리고 부산을 쳐들어왔다. 이에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도주하였으나 발()을 중심으로 한 정예군만이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화살이 다하자 한 비장(裨將)이 발()에게 도주할 것을 종용하자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자는 중벌(重罰)에 처하겠다."하고 백병전에 돌입했다가 발에 총을 맞아 장렬하게 순절했다. 발()의 아들 흔(昕)은 정유재란 때 조정(朝廷)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 지원(支援)에 힘썼으며, 사량(蛇梁) 만호(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旌善) 현감(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 외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 노량(露梁) 해전에 서 적선 300여척을 대파(大破)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던 호(浩)와 인조(仁祖)때 강화(講話)에 항거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던 응신(應莘), 숙종(肅宗) 때 (오사인(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四大臣: 조태채,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던 인중(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 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월성위파(月城尉派):
  검교(檢校) 대장군(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奇)의 후손에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龜)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역임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1581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珍島) 군수(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 경주(慶州),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필(弼)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追封)되었다.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한편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果川), 의성(義城) 등지(等地)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던 기(其)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과 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지내고 봉럴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漢城府) 소윤(少尹)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슬하에 아들 5 형제가크게 현달(顯達)하여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의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언양(彦陽) 현감(縣監)과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던 차온(次溫)은 상주(尙州) 판관(判官)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勸農兵馬節度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簒奪)하자 평양(平壤) 판관(判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後生) 강학(講學)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우 차량(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기(其)의 셋째 아들 차공(次恭)은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영천(永川) 군수(郡守)와 평산(平山)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吏曹) 참의(參議)에 재임(在任)했으며 기의 넷째 아들 차검(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 했다.

청백수절(淸白守節)은 정(貞)이요 정직무사(正直無邪)는 간(簡)이라 하여 정간(貞簡)으로 시호(諡號)를 받았던 차양(次讓)은 1452년(문종 2)에 학행으로 봉직랑(奉直郞)에 천거되어 해남(海南)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형(兄)들과 더불어 5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함께 다리를 건너 왔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영교(五榮橋)라 불렀다.

그 밖의 인물로는 견(堅)의 아들 대영(大英)이 임진왜란때 사촌동생 대방(大方: 후의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서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대방(大方)은 대구 팔공산(八空山)에서 권 제(權 濟), 최 입(崔 笠), 조호익(曺好益), 정경세(鄭經世) 등 31명과 회맹(會盟)하고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대영(大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선조 때 음성(陰城) 현감(縣監)을 지냈던 구(構)와 함께 경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자료:  한국인의 성씨총람(경주정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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