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all | close all

〓 慶州 鄭氏는 모든 鄭氏의 「큰 집」〓

鄭氏는 「지백호」원조를 그 뿌리로 하고 있지만 그 자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본관(本貫)개념의 큰 둥치들이 새롭게 뻗어났다.  그만큼 씨족의 맥이 여러 갈래로 뻗어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는 286개 성씨 가운데 후손들이 많을수록 대성(大姓)이라는 표현을 쓴다.

대성인 鄭氏의 경우 조선시대에 무려 247개 본관이 있었다. (한국 총인구의 20%가 넘는 金氏의 경우 무려 623개 본관이 설정된 적이 있었다.)

鄭氏는 2000년 11월 현재 경주를 비롯 동래, 영일 등 138개 본관이 있고,  그 후손들만도 2백여만명(62만6천여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010년 현재로는 22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에 있는 鄭氏 인구수를 합치면...?)   없어진 본관의 경우 그 후손들이 상위선조의   본관으로 되돌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47개 본관에서 138개 본관)
  
<중국 춘추시절에 태어난 공자(孔子:BC552년)의 경우 족보에 등재된 후손들 170여만명, 그렇지 못한 후손 30여만명 등을 합쳐 200여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보다 335년 늦게 태어난 지백호 원조의 후손들이 200여만명에 이른다는 것은 鄭氏 후손들의 번창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과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138개 본관 가운데 인구수 2천명 이상의 본관이 39개에 이르고, 1개 또는 2개 가구만으로 관향을 설정한 鄭氏도 6개 본관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본관을 기준으로 鄭氏의 큰 씨족집단은 동래(42만여명)를 비롯, 영일(34만여명), 경주(30만여명), 진주(24만여명), 하동(16만여명) 등의 순이고 그 이하는  10만명 미만이다.

경주 鄭氏의 30만여명은 현재의 진주시 인구(30만여명)수준이다.   
인구수 3백명 이하의 본관수도 35개에 이르고 있다.  인구수 3백명 이하라면 20세기 이후 본관을 새로이 설정한 셈인데, 이런 점에서 보면 鄭氏들은 그만큼 독불장군(?)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경주」라는 본관은 어떻게 설정된 것일까.
<예전에는 경주의 옛 이름대로 월성(月城) 鄭氏라고도 했다.
현재도 월성鄭氏로 고집하는 집안도 있다. (2000년11월 현재 392가구,1300명)>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왕건(太祖王建:917년)은 각 지역의 유력 호족 (豪族)들을 껴안는 것으로 통치술을 발휘했다.  유력 호족들은 수많은 노비들을 거느렸고, 이 노비들이 유사시에는 창이나 활을 드는 군사력으로도 변했기 때문이다. 후에 광종(4대)이 실시한 노비안금법(노비 해방)도 사실은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통치술의 하나로 왕건은 전국 호족들의 딸을, 나이에 관계없이 후비(後妃)로 맞아들여 호족인 아버지의 반심(反心)을 못갖게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왕건은 6명의 정부인과 23명의 후궁을 거느렸다.)

이와함께 왕건은 940년, 전국을 대상으로 지적부(地籍溥)를 만든 후,각 지역의 유력 호족들에게 씨족개념의"씨성"(氏姓)과 토지개념의 "토성"(土姓)을 부여했다.   
즉 일정지역의 토지를 주면서 그 지역의 유력호족들에게 「○씨의 △△땅」  (△△은 지역명)이라는 선을 그어준 것이다.

이 「토성」이 곧 오늘날의 「본관」이 된 것이다.
씨성과 함께 토성을 부여받은 각 지역의 호족들은 당해지역의 지배권을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정치 분야에도 깊숙히 참여할 수 있었다.

같은 지역을 두고도 수많은 성씨들이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당해지역의 일부를 관할했던 호족들이 씨성과 함께 토성을 부여받은데 따른 것이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들이 많은 것은 경주(月城)가 신라의 수도여서 호족들과 큰 벼슬을 지낸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있는 모든 성씨와 본관이 이때 모두 부여된 것은 아니다.
당해지역에서 큰 벼슬을 했거나 일가(一家)를 이룬 후손들이 이를 본받은 경우도 적지 않다.
경주鄭氏는 태조왕건이 씨성과 토성을 부여할 당시 이미 성씨를 가진 호족으로서 경주 일부지역을 관할하고 있던「진후」(珍厚)에게 그 지배권을 재차 인정해 준 것이다. 경주鄭氏의 모태가 되는 셈이다.

상당수의 성씨들이 본관으로 설정한 연유와 달리 경주鄭氏는 일찍이 그 본관을 정부공인으로 받은 것이라 하겠다.
「득관(得貫)」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진후」를 경주鄭氏의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진후」시조는 「지백호」원조의 42세손으로 장종손가(長宗孫家)의 가통(家統)을 그대로 이어왔다.
「진후」시조는 고려초기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을뿐아니라 병부상서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특히 이학(理學)과 문장(文章)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 11대 문종시절(1050년경) 해동공자(海東孔子:바다동쪽에 있는 공자)라 불리울 정도의 대학자이면서, 문하시중으로 4대 임금을 모신 최충(崔冲)의 시호도 문정공(文正公)이다.>

※ 시호(諡號):선왕(先王)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또는 경상유현(卿相儒賢)들이 죽은 후 그들의 행적을 평가하여 임금이 추증하는 이름이다.    시호 중에서도 문(文:주로 文臣)자나 충(忠:주로 武臣)자가 들어간 시호를 더 높이 평가한다.  이를 받은 분의 가문은 큰 영예로 생각했고 자긍심도 가졌다.
조선시대 중반기 이후에는 큰 벼슬자리에 있던 후손들이 그 윗대 조상들에게 시호를 추증 받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진후」시조가 장종손가임을 증명하는 것은
①지백호 원조의 본고장인 경주지역에서 대대로(1천여년)살아왔고,
②다른 지역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鄭氏들의 시조는 지백호 원조의 32세손~40세손 등인데 반해 42세손이며
③경주鄭氏가 고려 건국 초에 그 본관이 설정된데 비해 다른 본관은 고려  초엽 또는 중엽이후에 설정됐다는 점 등이다.

이외에도 경주鄭氏들은 지백호 원조를 기준으로 세손을 이어오는데 반해 다른 관향(본관)의 鄭氏들은 대부분 관향 중심의 세손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본관의 鄭氏들은 경주鄭氏를 범(汎) 鄭氏의 대본(大本) 또는「큰 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는 이설(異說)이 없다.
참고로 △동래鄭氏(僑林)와 영일鄭氏(佶模)는 지백호 원조의 32세손  △온양鄭氏(普天)는 34세손 △초계鄭氏(倍傑)는 36세손 △하동鄭氏(遜位)는 46세손 등이 된다.
  
※ 현시대에 와서 뛰어난 후손들이 많은 하동鄭氏의 경우 경주鄭氏에서 새로이 그 가지를 뻗쳐나간「진후」시조의 후손들이다.
하동鄭氏는 「진후시조」직계의 4세손인 손위(孫位:46세손)선조가 경남 하동에 본거지를 잡고 이곳을 관향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국 대재벌의 하나인 현대그룹의 鄭氏들은 하동鄭氏로, 창업주인 고 정주영회장은 손위선조의 23세손이다. 경주鄭氏 계열로 보면 69세손이 되는 셈이다.    고 鄭회장은 백운대의 묘역 정화작업에 재정적 뒷받침을 했다.
하동鄭氏가 「진후」시조의 후손이라는 점은 전국 정씨연합 중앙회 회지(會誌)인 「정씨종보」6호(2007년11월)에서 정몽준(鄭夢準:고 정주영 회장의  6남 국회의원)의 축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鄭의원은 “저는 하동鄭氏 24대손인데, 하동鄭氏는 경주鄭氏에서 비롯된 후 46대째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라고 서술해 두었다.
  
※ 서산(瑞山)鄭氏와 낭야 鄭氏는 지백호 원조의 뿌리에서 제외된다. 
서산鄭氏는 중국  송나라 멸망 후 고려(瑞山 看月島)로 망명(1237년)해왔던 정신보((鄭臣保)의 후예들이다. 정신보는 이 땅에 최초로 성리학(性理學)을 전래시켜 가려쳤을뿐 아니라 인주태수(신의주)등 높은 벼슬자리를 지냈다. 시조는 그의 아들인  양렬공 정인경(鄭仁卿).  2000년 11월 현재 서산鄭氏의 후손들은 1만5천여명(4.760여가구)에 이르고 있다.  
“낭야鄭氏”도 선조가 중국 낭야지방에서 이주해왔다. (후손. 약 1천여명)

참고로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286개 성씨 가운데 절반 가까운 130여개 성씨는 귀화인들의 성씨다.
이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 일본, 몽골, 베트남, 아랍, 위구르 등 여러 나라로부터 귀화, 토착민들과 섞이며 대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바다와 대륙이 만나는 지정학적 특정상 우리도 바깥세계와 인종교류를 하고 그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20세기 후반부터는 주한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도 증가하고 있다.
2000년 초 50만명 수준이던 주한 외국인이 2009년에는 120만명에 이르러 인구측면에서도 과히 국제화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겠다. 

2009년의 경우 한국으로 귀화한 외국인만도 49개국 2만 5천여명에 이르고 있고, 이 현상은 앞으로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귀화인들의 상당수가 한국식 성(姓)과 본(本)을 따라 새로운 성을 짓고 본을 정하는 창성창본(創姓創本) 현상도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만해도 「몽골 김씨」 「태국 태씨」 「대마도 윤씨」 등 귀화인들이 새로 설정한 창성창본의 숫자가 4884개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춰 우리가 다같은 「단일민족」이고 「배달의 자손」이라며 배우고 자랑해왔던 시대는 또 하나의 과거로 묻혀가는 셈이다.

×                  ×                    ×

◎ 진후시조의 비문 요약 (1987년 후손 東暉 지음)
  
<고려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병부상서 겸 판군기사윤 평장사 시 문정공의  제단이 시조 낙랑후의 산소와 함께 있다.  성을 鄭氏로 부여받은 이후 신라 천년이 지나는 동안 대대로 정승과 대장이 나와 높은 가문이 되었지만 여기에 모두 기록 할 수 없고, 고려에 들어와  진후공에게 가까운 조상으로 평장사 경문(景文:고조), 이부상서 성지(性之:증조),  판문하시랑 손경(遜卿:조부), 예부상서 극중(克中:부친)이 있다.

지난날 문정공(진후)의 7대손인 양경공 희계(熙啓)께서 가첩(家牒)을 만들시 선계(先系)를 문정공에서 시작했다고 한 점에 비춰 공의 인품과 행적을 짐작할 수 있지만, 오늘날 이 가첩이 전하지 않고 있을뿐아니라 생년월일까지 상고 할 수 없으니 슬프다.

그러나 위로는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이 있고, 아래로는 석학대덕(碩學大德)의 후손이 있어 공의 덕업(德業)을 전하고 있는 만치 지나친 찬양의 글이나   증거 없는 사적을 꾸밀 필요가 있겠는가.
유독 불행한 것이 있다면 산소를 잃은 점이다.
수많은 세월동안 후손들이 슬픈 점을 간직해 오다 제단을 만듦에 낙랑후의 묘소에 가깝게 하였도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엮인글 :
이 게시물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 〓 뿌리 깊은 큰 가지 (枝) 〓 ChungFamily 2010-06-18 906
15 〓 後 記 〓 ChungFamily 2010-06-18 784
14 〓 慶獻齋에 꽃피운 兄第會 〓 ChungFamily 2010-06-17 762
13 〓 行商으로 맥이은 선조 이야기 〓 ChungFamily 2010-06-17 1109
12 〓 連坐制에 따른 집안의 쇠퇴 〓 ChungFamily 2010-06-17 931
11 〓 身分계급이 지배했던 社會風潮 〓 ChungFamily 2010-06-17 1119
10 〓 通政大夫가 삯티운 사천문중 〓 ChungFamily 2010-06-17 1033
9 〓 220여년 전 泗川지역에 터전 〓 ChungFamily 2010-06-17 1045
8 〓 良景公이 만든 경주鄭氏 族譜 〓 ChungFamily 2010-06-16 1158
7 〓 5차公派를 3개 마디로 조정 〓 ChungFamily 2010-06-16 998
6 〓 文科급제 5父子 집안의 家勢 〓 ChungFamily 2010-06-12 1750
5 〓 文獻公派는 西.南海岸에서 번성 〓 ChungFamily 2010-06-12 996
4 〓 氏族의 脈은 人類 공통의 價値 〓 ChungFamily 2010-06-12 813
3 〓 文科급제자 23명의 名門家 〓 ChungFamily 2010-06-09 1090
» 〓 慶州 鄭氏는 모든 鄭氏의 「큰 집」〓 ChungFamily 2010-06-09 1765
1 〓 鄭氏의 元祖는 「智伯虎」〓 ChungFamily 2010-06-09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