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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 휘 현영 양세 제단비문 역문(譯文)     방손 동휘 찬

 

호남(湖南)의 태인읍 서쪽 무성리 향도곡(香桃谷) 언덕에 세개의 비석이 한 줄로 세워진 곳이 있으니 이것이 경주정씨 양세 사위(四位) 제단인데 서쪽에 위치한 어른이 고려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헌공으로 이름이 현영이시고 가운데 위치한 분이 영록대부 이부상서 월성군(月城郡)으로 이름이 종철(宗哲)이시고 동쪽에 위치한 분이 광록대부 보문각대제학 안숙공으로 이름이 종보(宗輔)로 그의 부인이신 정부인 벽진이씨이며 월성군과 안숙공 두 분은 모두 문헌공의 아들이 되신다. 

 

대개 양세 사위의 의석지장(衣舃之藏 산소를 말함)이 세상에서 전하기를 송도(松都 개성을 말함) 정산(鄭山)에 있다는 것이 오래고 먼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실전되어 심목의 증거가 없으니 봄 이슬과 가을 서리가 내릴 때마다 자손들이 매양 추모의 뜻을 붙일 곳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왔다.

 

신유(辛酉 서기 一九八一)에 후손 기승이 추원의 뜻이 깊어서 일가들의 힘을 모아 천분(薦芬 제사를 올림)함으로 영구한 법을 정해 놓았는데 다만 천포(薦布 돈을 말함)가 넉넉치 못해 약간의 의절이 무(武 무왕의 악명으로 진미함을 말함)는 되었으나 소(韶 순의 악명으로 진미함을 말함)가 못되었다. 

 

그뒤 四년만인 갑자(甲子 一九八四) 가을에 오중(吳中 일가가 많이사는 고장)에서 의논이 있기를 “일은 진선함이 귀(貴)하고 때는 잃지 않는 것이 귀한 것이다.” 하여 보존회(保存會)를 조직하여 재정을 확보함에 멀고 가까운 곳의 일가들이 힘을 다해 일찍이 신유년에 소가 못된 것을 하나 하나 차서있게 선함을 이룩하니 아! 슬프도다 누가 단이 묘만 같지 못하다 말하겠는가?

 

오늘날 살펴봄에 서구의 바람과 왜놈의 조류에 온 세상이 캄캄한 밤이 되어 할아버지의 뼈와 아버지의 살을 다비(茶毘 화장을 말함)에 붙이고도 뻔뻔스럽게 자상(泚顙 부끄러워 이마에 땀이 흐름)치 않는 자들을 가끔 가끔 들을 수 있고 또 혹은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해 대강 루리(루梩 루는 흙을 담는 그릇 리는 흙을 운반하는 도구로 장사 지낼 때 쓰는 도구)로 시체를 파묻고 봉분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바다를 건너가 성묘를 끊어 버리니 얼마 동안이나 쑥이 무덤 위에 가득하고 여우와 토끼 같은 짐승들이 뛰어 노는 장소가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이 가끔 있어 보기가 어렵지 않음을 생각할 때 오늘날 四위제단이 비록 네자 높이의 산소는 아니나 거조위단(去祧爲壇 五대가 지나면 단을 모으고 제사를 지냄)이라는 말이 예서 에 증거할 만한 것이 있음과 동시에 조상의 향화가 百年전에 이어 거행되고 운예가 추모의 뜻을 붙임이 천추 뒤에도 장소가 있게 됨은 왕왕지문(往往之聞 위에서 말한 화장을 가리킴)에 정영(筳楹 橫과 直으로 맞지 않는 뜻)의 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비지견(比比之見 위에서 말한 해외로 건너가 성묘치 않음을 가리킴)에 소양(霄壤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동시에 四위의 루루지영(굶주린 영혼)이 삭막한 물가 깊은 산속에서 방황하던 것이 앞으로는 양양(洋洋 신도가 기꺼이 흠향하는 뜻)히 이 곳에서 내려오면서 말씀 하시기를 “나도 후손이 있구나” 하실 것이니 아! 아! 산소인들 무엇이 이 단보다 나을 것이 있으랴?

 

경주정씨는 멀고 먼 가계로 신라 낙랑후 지백호께서 보책에 나타난 근원이시고 고려때에 와서 문정공 이름은 진후 벼슬은 평장사 이셨고 三대를 내려와 이름은 위 벼슬은 좌복야로 이 어른이 바로 문헌공의 아버지 이시다.  월성군이 두분의 아들을 두셨으니 인용(仁龍)은 벼슬이 중랑장이셨고 인조(仁祚)는 벼슬이 대장군으로 시호가 충렬공(忠烈公) 이셨다.   안숙공이 네분의 아들을 두셨으니 인온의 벼슬은 상서 이셨고 인량의 벼슬은 정언(正言)이셨고 인공의 벼슬은 우사간 이셨고 인검의 벼슬은 보승랑장 이셨다.

 

중랑장의 아들 진의 벼슬은 병조참판으로 莊光(단종과 세조를 말함)의 때를 만나 일찍이 시기를 내다보고 남쪽으로 내려와 무성에 대대로 살게 되었으니 오늘날 무성에 제단을 마련하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다.

 

어느 사람이 “제단을 설치할 땅이 아님을 논란하여 말하기를 무성땅에 정씨가 살게 된 것이 병조참판공에서 부터 시작 되었은 즉 세분(文獻公 월성군 안숙공)이 생존 해서나 돌아가 산소를 모심에서나 이곳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하거늘 내가 대답 하기를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함이 신의 이치로도 편안할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산소가 한곳에 있음이 족장(族葬 씨족 단위로 한곳에 산소를 씀) 법에 가까움과 동시에 제단이 이곳을 떠나 어느 곳에 설치 하겠는가?  또 더욱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운은 자손의 몸에 실려 전해지고 자손의 정성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제사 함에서 드러나는 것이니 드러나는 자손의 정성으로 전해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기운을 감동 시키면 먼 만리도 곧 나의 좌우가 될 수 있고 긴 백세도 곧 한 방에 있을 수 있음이랴” 하니 말하던 자가 무연하여 물러갔다. 

 

일이 어지간히 끝나감에 온 일가들이 모여 말하기를 일이 막중한 일이니 마땅히 전말 년 월을 비에 새김이 있어야 된다 하여 용균(容均)을 보내 수 백리를 달려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니 내 글을 어찌 감히 할 수 있으랴 마는 방손의 처지에 의가 감히 사피 할 수 없어 글 적음을 우와 같이 하여 비에 새겨 세상에 알림을 영구히 하도록 하노라.

 

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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