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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공 휘 효종 묘비명 역문(參議公 諱孝終 墓碑銘 譯文)  五十一世 (1434-1497) 南原

旁孫 東暉 撰

 

공(公)의 이름은 효종(孝終)이요 자(字)는 가정(可貞)이다. 경주정씨가 신라의 낙랑후지백호에서 시작되었는데 낙랑후의 쌓은 덕과 남긴 어짐때문에 씨족이 몹시 번창하고 가문이 성하고 큼으로 다 적지 못할 정도이다.

 

오직 고려때에 문정공 진후 창렬공 보기, 문헌공 현영, 안숙공 종보 등등이 거듭된 세대(世代)에 이름난 벼슬을 차례로 지냈는데 이 분들이 모두 공의 구대 할아버지 이하의 가까운 조상들 이시다.

 

안숙공의 아들은 보승랑장인데 처음으로 남원(南原) 땅에 살았다.
랑장의 아들이 교도 염(廉)이고 교도의 아들 노송정 지년의 벼슬은 사예로 증직이 의정부좌랑찬성 이시다.
노송정공이 삼계주씨(森溪周氏)에게 장가들어 四남을 낳았는데 모두 과거(科擧: 문과 즉 지금의 고등고시)에 올라 일시에 빛났으니 그 중에 셌째 아들이 바로 공이시다.

 

공은 영릉(英陵:세종의 능호) 갑인(甲寅:세종 十六 1434년)년 九月 五日에 태어나 광릉(光陵:세조의 능호) 병자(丙子 세조 二 1456년)년에 생원시에 올랐고 무인(戊寅 세조 四 1458년)년에 알성시에 올라 승무원의 정자가 되었다가 가을에 저작(著作)으로 옮겼다.

 

경진(庚辰: 세조 六 1460)년 년 봄에 박사(博士)가 되었고 신사(辛巳 세조 七 1461)년 가을에 교감이 되었고 겨울에 매우(梅佑)의 종사관(從事官:병명사원의 임시수원)으로 명나라에 가서 잡혀간 사람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임오(壬午 세조 八 1462)년 정월에 거듭 뒤를이어 부모상을 당하니 어버이의 상사에 입는 상복을 예대로 하였고 갑신(甲申 세조 십 1464)년에 부모의 복을 벗고 여름에 동부주부가 되었다.

 

병술(丙戌 세조 十二 1466)년 여름에 예문관봉교를 겸하였고 가을에 문폐사(問弊使 폐단을 문초하는 일을 담당)로 발탁(拔擢) 되어 전라도에 내려가 법을 지키지 않는 수령(守令 각고을을 다스리던 벼슬아치 즉 원님) 들을 탄핵(彈劾) 하였고 겨울에 수령의 주고(推考 벼슬아치의 허물을 추문하여 고찰함) 함을 가을의 일처럼 하였다.

 

정해(丁亥 세조 十三 1467)년 가을에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으로 건주위(建州衛 압록강건너여진족으로청나라의 발상지)를 정벌(征伐 죄있는 무리를 군대로 침) 하였다.

 

이듬해 창릉(昌陵 예종의 능호)이 임금 자리에 올라 대사령(大赦令 대사를 베푸는 국가원수의 훈령)을 내리니 가을에 사령(赦令)을 받들고 함경도에 갔고 외직(外職 지방관청의 벼슬)으로 나아가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선릉(宣陵 선종 능호)이 임금 자리에 오르니 내직(內職 조정의 벼슬)으로 들어와 성균관의 직장이 되었고 경인(庚寅 성종 二 1470)년 봄에 봉상시첨성으로 승진하였고 가을에 전라도에 내려가 재앙이 있는 논밭을 살폈으며 신묘(辛卯 성종 三 1471)년 봄에 이극배와 종사관으로 전라도의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였다.

 

가을에 어유소의 종사관으로 올적합(兀狄哈 여진족의 두목)을 정벌 하였고 겨울에는 한명회의 종사관으로 두 진영의 군사(軍士)를 관장하였다.

 

계사(癸巳 성종 사 1473)년 가을에 사재감의 부정으로 승진하였고 얼마 안되어 일본국의 사신을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지켜 보냈다.

 

갑오(甲午 성종 五 1474)년 가을에 김질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경릉(敬陵 덕종 즉 성종의 생부)의 고명(誥命 중국의 황제가 우리나라 임금에게 내려주는 왕위 계승을 인준하던 조칙)을 청하였고 을미(乙未 성종 六 1475)에 봄에 논밭과 쇠뿔로 수놓은 활을 임금이 내려줌이 있었으니 지난해 명나라에 갔다 온 때문이며 가을에 도총부경력으로 옮기었다.

 

병신(丙申 성종 七 1476)년 봄에 다시 사재감의 부정(副正)이 되었고 가을에는 둘째 형 계림군 효상(孝常)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니 진하(進賀: 중국 왕실에 경사가 있을때에 축하하기 위하여 보냄)의 일 때문이었다.  이듬해 봄에 여제관(여祭官 나라에 역질이 돌 때에 지내던 제사의 헌관)으로 황해도에 갔으며 무술(戊戌 성종 九 1478)년 겨울에 승문원의 참교로 승진하였다.

 

기해(己亥 성종 十 1479)년 겨울에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는 일이 있어 사신이 와서 우리 나라에서 구원병을 청하니 조정의 의논이 큰나라를 택하여 섬김에 급급하여 군병을 싸움터에 보내기로 꾀하여 미리 작정을 하였다.  공이 홀로 긴 상소를 올려 깊은 겨울에 군병을 싸움터로 내보냄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은 점과 이웃에서 싸우면 문을 닫아도 된다는 성인의 말이 증거가 있는 점을 들어 간하니 주위에서 옳게 여겼다.

 

신축(辛丑 성종 十二 1481)년 봄에 이문(吏文 자문 거계 감자 감결 보장 제사등에 쓴 특수한 문체)의 회시(堂下文官에서 다시 전시를 보게함)에서 성적이 첫째로 우등하여 내자시의 시정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승문원참교와 한학교수(漢學敎授 중국어를 가르침)를 겸하였고 여름에는 맏형 대사성 효항(孝恒)과 더불어 여지승람(輿地勝覽 우리나라의 지리지)을 찬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방납(防納 백성들이 바치는 공물로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공인들이 대신 바치고 그 값을 갑절이나 받던 일을 말함)에 관계되어 파직되었다.

 

계묘(癸卯 성종 十四 1483)년 겨울에 호군에 다시 임용됨과 동시에 혜민서교수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겨울에 통정대부로 승진되었으며 이듬해 가을에 삼국의 정치를 논하는 문신회시에서 성적이 첫째로 우등하였다.

 

무신(戊申 성종 十九 1488)년에 예조참의가 되었고 이듬해에 병조참의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겨울에 가정대부로 승진하여 오위장을 겸하였으나 이듬해 을묘(乙卯 연산 一 1495)녀에 연산이 임금 자리에 오르니 이해 十月에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왔다.

 

대개 공이 돌아간 정사(丁巳 연산 三 1497)년 二月 八日까지는 十五개월 전이었으니 타고난 수명(壽命)이 앞으로 가까와지고 또는 연산이 임금 노릇 못할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 아닌지 나이가 六十四세로 남원읍 북쪽 송현(松峴)의 자원(子原)에 안장하니 선영을 쫓음이다.   부인은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지(智)의 딸인데 공보다 一년 먼저인 계축(癸丑 세종 十五 1433)년 四月 十三日에 태어났고 공보다 七년 먼저인 경술(庚戌 성종 二一 1490)년 九月 十七日에 돌아가 합장하였다.

 

아들 갑선은 부사과이며 손자 맏이 내는 교위이고 둘째 희교는 충순위이고 셌째는 희증이고 넸째 희순은 좌랑이며 증손과 현손 이하는 충과효로 지체가 높고 유서가 있는 집안을 더욱 빛냈는데 번창하여 다 기록치 못한다.

 

아! 공이 벼슬에 오른지 四十년 동안에 시문으로써 이름이 남은 네번이나 과거에서 울리었고 재목은 세번의 사신에서 드러났으며 재상(災傷 천재로 인하여 입은해)을 살핌에 언덕과 구렁에 빠진 백성을 건지었고 간교한 관리를 조사함에 뇌물의 욕심을 맑게 하였으며 성종(成宗) 기해(己亥 성종 十 1479)년에 올린 상소(上疎)가 분명함이 오늘까지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어 글자 글자마다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고 글귀 글귀마다 귀신을 울릴만 하니 진실로 백성 사랑함은 몸보다 더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을 집보다 더 걱정하는 정성이 없다면 어찌 능히 이 같을 수 있겠는가?  신축(辛丑 성종 十二 1481)년 방납의 일은 적은 안개가 하늘을 가림에 지나지 못하니 족히 말할 것도 못된다.

 

 공의 높은 문장과 거룩한 사실의 행적이 빛나고 아름다움이 저 같거늘 예날에 세운 묘갈에 미쳐 모두 기록하여 싣지 못하였다.  후손 봉균이 이를 민망히 생각하여 장차 빗돌을 고쳐 새기고져 하여 나에게 실록에 실려 있는 빛나고 아름다운 사실의 행적을 글로 적어 줄 것을 부탁하니 내 그의 조상을 드러내고저 하는 참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을 무겁게 여겨 기록함을 위와 같이 하노니 사실은 옛사람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옛날것에  비하여 기록하고 창작하지 않음)이다.     거듭이어 새기는 글을 써 이르노니,


"정씨가 우리나라에서 거듭된 세대에 충과 효를 전하였도다.  노송정(老松亭)에 이르러 그 시작한 일이 더욱 컸도다.  노송정이 덕을 감추고 빛을 숨겨 후손에게 이롭게 하였더니,  오직 공의 태어남이 노송정공이 닦은 복을 받았도다.  
아버지는 높고 형제는 빛나니 두 세대에 다섯분의 과거는 세상 사람이 모두 영광으로 생각 하였도다. 


또 공의 빛남은 문과 질이 모두 고루 갖추어져 이름은 두번의 장원에 높았고 사신으로 가서는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아니하였도다.   별안간 삼저의 시호(市虎  세사람이 거짓을 말하면 시장에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도 믿게 됨)가 있었으나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니,  태양의 밝음에 무슨 손상이 있으랴?    굴하였다가 바로 펴졌으니 앞으로 나아감이 한량이 없을 것인데,  하루 아침에 용감히 물러남에 종일(終日)을 기다리지 않았도다. 


마땅히 후손에게 물려줌이 멀고 오래할 것이다.  성하고 성한 후손이 천명 만명이 되었도다.   
비석을 두번 세움에 아름다운 사적은 길이 빛날 것이로다."

 

출처: 경주정씨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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