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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科급제자 23명의 名門家 〓

그렇다면 조선시대들어 명문가의 잣대가 되기도 했던 경주鄭氏의 문과급제자수는 어느 정도 일까? 
鄭氏 전체로는 752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고 관향별로는 동래鄭氏(198명),영일鄭氏(119명)가 1백명 이상을, 그리고 해주鄭氏와 진주鄭氏에 이어 경주鄭氏가 23명을 배출했다. 이의 상당수가 전북 태인의 조상들을 주축으로 급제했고, 급제자의 상당수가 이조판서 등 높은 벼슬자리를 지냈다.
무과(武科)와 역과(譯科) 그리고 의과(醫科) 등 비정기적으로 시행됐던 과거까지 합치면 182명(경주鄭氏)에 이른다.

많은 씨족들 가운데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의 수에서 해당 씨족계통 집안의 가세(家勢)를 평가한 적이 있었다. 무과(武科) 등도 있었지만 문과(文科)를 훨씬 높게 평가했다. 물론 정승이나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 또는 왕비(王妃)가 나온 집안도 가세 확장에 한 몫 하기는 했지만 기본은 문과급제자에 있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사서삼경을 통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 방면에 걸친 지식습득과 효(孝)나 충(忠)에 대한 가치관 또는 국가관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이었다.
어릴적 신동(神童)이라고 불릴 정도로 총명했던 선비들이 낙방을 거듭하는가하면, 가문 전체의 명예를 걸고 똑똑한 자식 하나를 50세가 넘도록 이에  매달리게 한 집안도 없지 않았다.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더라도 「급제」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삼는 사회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문과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은 전주李氏로 873명이고, 다음이 안동 權氏(359명), 파평尹氏(331명)등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씨족의 맥을 기록한「족보」가 있고 없음에 따라 귀천(貴賤)이 구분됐는가 하면 이 족보가 사회적 신분의 잣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를 못가지면 상민(常民)으로 취급되어 군역(軍役)을 맡아야 했고, 양반가나 벼슬집안의 시중드는 일을 감내해야 하기도 했다. 족보가 없는 경우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 계속돼 왔다.

그렇다고 아무나 이 족보를 가질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성(姓)마저 갖지 못해 「마당쇠」나 「돌쇠」로 살아오면서 후손들에게 씨족의 맥을 전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천민취급을 받던 백정(白丁)이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사들여 다른 곳으로 이사가서는 양반행세를 하기도 했다.
원래 족보가 없었지만 그 지방의 농토를 사들여 부자가 된 일부 인사들은 아예 새로운 족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집안의 족보에는 가공적인 조상이 있는가 하면 당해조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것이 나중에는 사회문제화 하면서 족보의 가치성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사회풍조가 낳은 족보의 병폐현상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던 현시대에는 당시에 성씨도 갖지 못했던 마당쇠나 돌쇠의 후손들이 있고, 이 후손들이 모두 성씨를 갖고 있는 점에 비추어 나름대로의 씨족 맥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 온 「鄭氏라는 뿌리에서 경주鄭氏라는 큰 둥치로 뻗어 나온 씨족의 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며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 그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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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씨들의 수난
  
족보에 관한 여담하나 소개하면...
고려국을 세운 왕건과 그 씨족들은 "왕씨"(王氏)라는 성을 가지고 개성은 물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런데 조선국을 새로 세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 왕씨들을  모두 멸족시키기로 하고 처음에는 사형이나 귀양살이 등으로 형벌을 가했다.  이것만으로 멸족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개성지역의 왕씨들을 새로운 별천지(거제도)에 가서 살도록 하겠다며 예성강 하구의 선창에 불러 모았다.  사형이나 귀양살이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왕씨들은 이곳으로 모두 집결했다.

이방원은 왕씨들을 태운 선박들에게 서해바다까지 나가 배 밑창을 일시에  뽑아버리게 했다. 이렇게하여 거의 모든 왕씨들은 수장돼 버린 것이다.

이때 왕씨였던 이방원의 장인(애첩) 가족만은 제외했다. (현재의 개성 왕씨)
뒤이어 전국에 산재해있는 왕씨들도 모두 잡아들이도록 영을 내렸다.

이 소문을 들은 전국 각지의 왕씨들은 가지고 있는 족보의 왕(王)자에  「入들입. 선칼도. .점」등의 획을 가해 「全온전 전. 田밭 전. 玉구슬 옥」씨  등으로 변형시켜 관에 제시함으써 죽음을 피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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