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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공 휘효상 묘지명 역문 (齊安公 諱孝常 墓誌銘 譯文) 

五十一世(1432-1481) 坡州   延安 李淑瑊 記

 

우리 장원 정공이 돌아가신지 한달이 지나 공의 셋째 동생 내자시정 효종씨가 나에게 묘지를 부탁하니 내 차마 묘지를 지을 수 있을런지.....   

 

공의 이름은 효상(孝常)이요, 자는 가구(可久)니 경주인이다.  먼 조상은 고려의 우족 이었고 그 뒤에 전라도의 남원(南原) 땅으로 옮겨 살았다.    증조 인검은 벼슬이 보승랑장으로 증직이 통훈대부 군기시정이었고, 할아버지 염은 무안유학교도로 증직이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춘추관 수찬관이었으며, 아버지 지년은 중훈대부 성균관 사예로 증직이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지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계림군이었으니 모두가 공때문이다.

 

어머니는 삼계주씨니 선덕 임자(壬子 세종 14 1432)년 三月 十三日 임신(壬申)에 공을 낳았다. 공이 태어남에 영리하였고 자라 책을 읽고 글을 지음에 보통에 뛰어났다.

 

경태 신미(辛未 문종 1 145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주상(胄庠 성균관의이름)에 들어가 크게 학력을 발휘하니 명성이 날로 퍼져나갔다.  五년 갑술(甲戌 단종 2 1454)에 문과에 올라 선무랑이 되어 집현전 부수찬을 거쳐 지제교(知製敎 왕의 논시교시등의 문서를 제술함) 경연사경이 되었다.  六년 을해(乙亥 1455)년에 교량이 되었고 겨울에 정자가 되었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七년 병자(丙子 세조 2 1456) 二월에 세자사경으로 승진하였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여름에 관성(觀省 부모를 보임)으로 휴가를 얻어 남원에 내려 갔는데 마침 역당들이 공을 끌어 들여 옥에 갇혀 일이 어렵게 되었다.  세조가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말씀하기를 모가 오래 밖에 있었는데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특별히 석방하니 이로 인하여 한가히 있었다.

 

천순기원 정축(丁丑 세조3 1457)년 겨울 十二월에 승위교위를 제수받았고 충좌를 행하였고 사경을 섭행하였고 승문원교리 지제교 등을 겸하엿고 여러번 옮겨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가을 七월에 승문원부교리 지제교 겸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기었다.  四년 경진(庚辰) 봄에 이조좌랑 지제교로 옮기었고 여름에 승의랑이 됨과 동시에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六년 임오(壬午) 봄에 계속해 부모상을 당하니 초상의 모든 예절을 가례에 의거하여 슬픔이 몹시 지나쳐 온 마을이 칭찬해 마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마침에 곧바로 이조좌랑이 되었고 九월에 세자시강원문학으로 옮겨 예문관응교를 겸하니 대개 최고의 뽑힘이었다.

 

성화 기원 을유(乙酉) 봄에 조산대부로 승진하여 세자시강원필선이 됨과 동시에 예문관 응교 부지승문원사를 겸 하였고 여름에 또 좌중호 지제교를 겸하였고 나머지는 전과 같으며 얼마 안되어 봉열대부가 되었고 가을 七월에 사헌부장령으로 옮기었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임금을 따라 충청도 온양군에 갔다가 때마침 충청도감사가 금망(禁網 금하는법)을 어겨 죄를 받게 되었는데 공이 대성에 있으면서 빨리 탄핵치 않았다 하여 벼슬은 성균관직강으로 좌천 되었으나 겸직은 그대로 있었고 겨울 十二월에 세자 시강원필선이 되었다.

 

二년 병술(丙戌) 봄에 시강원필선으로 옮김과 동시에 예문관전한 및 승문원교감을 겸하였다.  三월에 복시 병과에 합격하여 중훈대부로 승진하니 문장과 재주의 명성이 더욱 더 드러났다.  얼마 안되어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四년(예종즉위 1468) 가을 九월에 예종이 임금이 되었다.  十월에 군자감정으로 옮김과 동시에 경연시강관을 겸하였다.

 

예종이 "공은 춘방시종(春坊侍從 세자시강원)의 옛 신하라" 하여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편수관으로 발탁하였다.  이 때에 간당(姦黨 간교한 무리 즉 남이강순을 가리킴)들이 틈을 타 난을 일으키고저 하거늘 임금이 곧바로 제거하니 공이 이일에 은밀히 도운 공이 있어 수충정난익대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계제는 가선대부가 되고 계림군(鷄林君)을 봉하였고 나머지는 전과 같으니 전에 없었던 일이다.  十二월에 가정대부로 승진하였다.

 

五년 기축(己丑 예종1 1469) 윤二월에 우부승지가 되었고 가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공사를 선발해 냄 즉 과거일을 담당하는일)가 되어 채수 등 三十인을 뽑아 과거에 합격시켰다.  공이 춘방에 시종할 적에 매양 경연이 끝날 때마다 공이 반드시 청익하여 말하기를 "임금의 학문이 반드시 넓게 해야 다른때 많은 일을 처리함에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가상히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공에게 말하기를 "한 시대가 흥함에 반드시 한 시대의 신하가 있는 것인데 경의 드러난 보도의 공로는 계옥(啓沃 임금의 마음을 열어 기름지게함)함이 많기 때문에 후설의 책임을 맡겨 나의 말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니 경은 가히 한 시대의 신하라 말할 수 있도다" 하시니 임금에게 사랑과 신임을 얻는것이 이 정도 이었다.

 

이해 겨울 금상(今上)이 임금이 되었다.  十二월에 좌부승지로 옮기었다.  六년 경인(庚寅 성종1 1470) 가을 九월에 승진되어 도승지가 되었고 겨울에 동지공거가 되어 신준 등 十六인을 뽑아 과거에 합격시켰다.  七년 신묘(辛卯 성종2 1471) 여름 四월에 순성명량좌리공신의 칭호를 더 받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八년 임진(壬辰 성종3 1472) 봄에 안량생 등 三十인을 뽑아 과거에 합격시켰고 겨울 十二월에 정헌대부로 승진되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폐사(陛辭 임금을 뵈옵고 임지로 떠남)하는 날에 임금이 공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경상도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도리를 상대하는 등등의 직책이 다른 곳과는 달라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안되겠기에 특별히 경을 보내는 것이니 가서 나의 이러한 뜻을 본받아 알리라" 하고 의습궁도(依襲弓韜 옷과 활집)를 하사 하시었다.  十년 갑오(甲午)년 봄에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가 되었고 三월에 오위도총관을 겸하였고 四월에 이조판서로 옮기었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다.

 

十一년 을미(乙未 성종6 1475)년 봄에 임금이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임에 공이 독권과(讀券寡 전시의시험관)가 되어 박형문등 二十인을 뽑아 과거에 합격시키니 전후에 뽑은 사람들이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비라 "세상에서 사람을 잘 뽑았다"고 칭찬 하였다.  十二월에 계림군을 봉하였다. 

 

十二년 신묘(辛卯) 一월에 책립황태자 진하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었고 가을 七월에 봉조하(奉朝賀 종신토록 그 품계에 알맞는 지녹복을 주고의식에 참여함)가 되니 작은 병이있기 때문이다.   十三년 정유(丁酉 성종8 1477) 윤三월에 봉조하로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임금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예종이 일찌기 말하기를 매양 경연을 당하여 글 뜻을 의논함에 통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하는 사람은 정모 같은 사람이 없다"하였다 하시고 드디어 동지경연을 명하였다.  十五년 기해(己亥 성종8 1479)에 다시 계림군을 봉하였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성하十七년 신축(辛丑 성종12 1481) 一월 四일 기묘일에 병이 심하여 집에서 돌아가니 춘추가 五十세였다.  돌아갈 적에 셋째 동생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초상과 장사에는 주문공의 예를 따르고 좌도(左道 불도를 말함)에 휴하지 말라"  또 말하기를 "남자는 부인 손에 죽지 않는 것이다." 하고 주위의 여자들을 내 보내도록하고 셋째 동생의 무릎을 베고 돌아감에 말 소리의 낭낭함이 평상시와 같았다.

 

부음이 알려짐에 임금이 몹시 슬퍼하시어 조시(朝市 조회와 시장)를 이틀 동안 파하고 관청에 명하여 부조와 제사를 하사토록 하고 시호를 제안(齊安)이라 주고 관청에서 장사를 주장토록 하여 그 해 五월 四일 무인에 경기도 교하면 고아동 남쪽 산 오좌자향의 자리에 장사하니 공의 영애는 가히 지극하다 말할 수 있도다.

 

공의 성품이 단아하고 몸을 행함에 간결하고 무거워 얼굴 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섬에 엄연히 다른 사람의 공경하고 두려워 하는 바가 되었고 명성과 위치가 더욱 높을 수록 행동함이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여 옛날 대신의 통도가 있었다.  공이 형제간에 있어 우애가 돈독하여 재물과 종을 나누어 줌에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았으며 친척과 친구를 대접함에 참되고 솔직하여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것) 때와 같으니 천성이 본래 그로하였다.  나이가 중수(中壽 팔십세를 말함)에도 못 이르고 벼슬은 상태(上台 정승을 말함)에 이르지 못함을 옴 세상 사람들이 애석히 여겼다.  공이 고향세족인 기채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 二녀를 낳으니 홍선은 참의 노공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창선은 어리며 딸은 사옹원정 최영호에게 출가 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아! 슬프도다.  숙함(淑瑊)이 공의 과방에 안(眼 둘째를말함)이 되어 길은 비록 운이(雲泥 구름과 진흙 하늘과 땅처럼 높고 낮다는뜻)처럼 현격 하였으나 정은 훈치(壎箎 형류의 이름 즉 형제를 말함) 같아 공을 생각함에 놀라 울부짖을 정도이니 차마 명을 할 수 있을는지......    드디어 눈물을 뿌리고 명사를 지어 가로되,

 

"살아서는 경성과 경월이 되어 나라를 상서롭게 하였더니, 돌아가서는 좋은 소리가 됨에 영화가 없어져 자취가 없도다.  극임(郄林 예날의 사람을 가리킨듯하나 누구인지는 알수가 없음)의 재주와 명예는 태산북두 보다도 무거웠고, 기린각의 공로는 이름이 맹부에 간직되었도다.  뜰에 가득한 난옥이 불후하여 산소에 글을 묻어 길이 뒷 세상에 전하도다."

  

자료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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