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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와 최씨 득성시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씨(鄭氏), 최씨(崔氏)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사이에 서로 상이한 부분이 있는데, 삼국사기 유리이사금 편에는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로 정하였다." 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혁거세편에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촌장(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사량부 정씨(沙梁部鄭氏)의 조상,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고 되어 있어 하사받은 성이 서로 바뀌어 있다.

 

두권의 사서중 이 부분에 관하여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르냐 하는 문제는 역사 학자들이 규명할 문제 이겠으나, 추후 명확하고 획기적인 사료가 추가로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지금 그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록 서기 32년도에 일어난 일을 1145년에 쓰여진 삼국사기와 1281년에 쓰여진 삼국유사를 근거로 명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겠지만,  두 역사서의 성격을 볼때 그래도 왕명을 받아 편찬 되었고 역사학자들로 부터 정통사서로 인정되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적으로 발간된 삼국유사 보다는 더 믿을 수 있는 자료라고 보아야 되겠다.   더욱이 정씨, 최씨 가문에서는 오래전 부터 정씨는 자산 진지촌 촌장 지백호를 득성조로, 최씨 가문은 고허촌 촌장 소벌도리를 득성조로 모셔오고 있는바, 각 가문에 전해져오는 기록들이 근거없이 전해져 오는것이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조선 세조 4년(1458년)에 시작하여 노사신,서거정,이파,김계창,최숙정 등이 삼국사를 완성하여 성종 7년(1476년)에 간행된 편년체 역사책  "삼국사절요" 역시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였고, 해당 기사가 서로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삼국사절요 편찬시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었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왕조 시대에 왕명을 받아 편찬하는 사서를 당시 학자들이 가볍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씨, 최씨의 득성 시조에 관한 본인의 생각은, 일이 있은지 이미 이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사건을 지금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으니,  빈약한 사료에 근거하여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논하고 의심하기 보다는, 그중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겨지며, 지금 우리가 알고 지키고 있는것 만이라도 후손에게 잘 전해주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 관련 기사부분의 원문과 국역문은 아래와 같으며,  관련 기사 부분의 삼국사절요는 삼국사기와 거의 동일하다.

 

신라 6부와 6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내용 비교표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1 유리왕 9년

[삼국유사]권1 신라시조 혁거세왕

 

6부개명이전

6부개명이후

6촌

촌장

강림지

6부

위치

1

梁山部 梁部

알천양산촌
閼川楊山村
謁平 瓢嵓峰

及梁部


 

2

高墟部 沙梁部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
蘇伐都利 兄山

沙梁部

3

干珍部 本彼部

자산진지촌
觜山珍支村
智伯虎 花山

本彼部

동남

4

大樹部 漸梁部

무산대수촌
茂山大樹村
俱禮馬 伊山

漸梁部

(일명 모량부)

5

加利部 漢祗部

금산가리촌
金山加利
祗沱 金剛山

漢岐部

6

明活部 習比部

명활산고야촌 明活山高耶村 虎珍 明活山

習比部

동북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1970년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대한민국의 보물 525호로 지정되었다. 그밖에 1981년 조병순 소장 영본(零本)과 경주부간본(慶州府刊本)이 각각 보물 722호, 723호로 지정되었다. 보물 525호와 723호가 유일한 완본으로 현전하며, 722호는 1책 44~50권이 전해진다.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EC%82%AC%EA%B8%B0)

 

(혁거세거서간 관련 원문)

三國史記/新羅本紀/卷1/赫居世 居西干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 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觜山珍支村 〈或云干[1]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2]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3]歲 岐嶷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역문)

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자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유리이사금 관련 원문)

三國史記/新羅本紀/卷1/儒理 尼師今 (卽位 9年 :32年)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 一云牟梁 姓孫 干[4] 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 [5] 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又設官有十七等 一伊伐湌 二伊尺湌 三迊湌 四波珍湌 五大阿湌 六阿湌 七一吉湌 八沙湌 九級伐湌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舍 十三小舍 十四吉士 十五大烏 十六小烏 十七造位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戲 [6] 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역문)

李丙燾. 新本.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1.이벌찬 2.이척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소사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왕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두 왕녀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시 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를 심사하였으며, 길쌈을 적게 한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길쌈을 많이 한 편에 사례하였다. 이 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오락을 하였다.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 행사를 할 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래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

 

註釋:

[1].榮·壽 「于」

[2].三國史節要 「里」, 舜 「里」

[3].三國遺事 王歷篇 및 三國史節要 「三」, 舜 「三」

[4].原本 「于」. 本書 卷1 赫居世居西干條에 의거 수정. 榮 「于」, 燾 「于(干)」.
[5].鑄字本 祗. 榮 祗
[6].原本 戱. 戲의 俗字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1]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 관련 원문)

三國遺事 卷第一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嵓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 <東山> <彼上> <東村>屬焉];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 “梁” 讀云 “道” , 或作 “涿” , 亦音 “道” ]<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 <麻等烏> <道北> <廻德>等南村屬焉[稱 “今曰” 者, <太祖>所置也, 下例知]; 三曰<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四曰<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金山><加里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 六曰<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 <仍仇旀村> <闕谷>[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역문)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혹은 탁부涿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빈자賓子.빙지氷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한기부(韓歧部)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촌장의 이름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3대 유리왕 관련 원문) 

第三弩禮王

<朴弩禮尼叱今>[一作<儒禮王>].
初, 王與妹夫<脫解>讓位, <脫解>云: “凡有德者多齒, 宜以齒理試之” .
乃咬餅驗之, 王齒多故先立, 因名 “尼叱今” , “尼叱今” 之稱, 自此王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卽位[《年表》云, 甲申卽位],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 詞腦格.
製犁耜及藏氷庫, 作車乘.  <建虎>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


(역문)

제3대 노례왕(弩禮王)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함])이
처음에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자 탈해는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오. 그러니 잇금을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 이리하여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일로 인하여 왕은 잇금[尼叱今]이라고 한 것이다. 이질금(尼叱今)이란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했다.

유성공(劉聖公) 갱시(更始) 원년(元年) 계미(癸未[23])에 즉위하여(癸未[연표年表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했다고 함]) 육부(六部)의 이름을 고쳐서 정하고 여섯 성(姓)을 하사했다.

이 때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으니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建虎) 18년(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작성: 鄭基晟

자료출처:

삼국사기 - http://bluecabin.com.ne.kr/samguksagi/samguk_menu.htm

삼국사기 - http://zh.wikisource.org/wiki/%E4%B8%89%E5%9C%8B%E5%8F%B2%E8%A8%98

삼국유사 - http://www.histopia.net/yusa/viewDocument.php?ori=yusa_01_018&til=%E6%96%B0%EF%A4%8F%E5%A7%8B%E7%A5%96+%E8%B5%AB%E5%B1%85%E4%B8%96%E7%8E%8B&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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