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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Family

2013.04.29 11:08

영일정28세손 님 안녕하세요,


영일정씨 이시군요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워낙 옜날일이니 기록에 다소 혼선이 생기는가 봅니다. 

헌데 위에 말씀하신 정종은 할아버지의 기사는 어디에서 보신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이곳 세계표에 있는 두분의 기사는 아래와 같으니 참고 바랍니다.


http://chungfamily.woweb.net/zbxe/?mid=EditPersonData&strPersonID=0100127001

정년(鄭年)
  생몰년미상, 신라 선덕왕(宣德王 제 37대 재위780~785) 때에 시중 파동(坡同)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때에 친구 장보고(張保皐)와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장교(將校 : 武寧軍少將)가 되었으며 특히 말을 타고 창(槍)을 쓰는데는 대적할 사람이 없으며 또한 잠수(潛水)에 능하여 바다 속 50리를 헤엄쳐도 숨이차지 않았다고 한다. 장보고와는 일찍이 서로 무예로 우열을 다투며 경쟁하였으나 나이가 많으므로 보고(保皐)를 형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기 823년(헌덕왕15) 당나라에서 보고(保皐)와 전답을 마련하여 1년에 미곡(米穀) 500석의 수확(收穫)으로 산동성문등현적산촌(山東省文登縣赤山村)에 법화사(法華寺)라는 신라의 사원(寺院)을 창건(創建)하여 유리산재(流離散在)한 교민(僑民)을 모아 신라방(新羅坊)의 구당소(句當所:사무를 담당한 곳)를 운영(運營)하여 정신순화(情神醇化)와 더불어 자치사회(自治社會)를 이룩하였다.  
827년(흥덕왕2) 보고(保皐)는 먼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었으며 그후 838년(희강왕3) 정월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청해진에 이르니 장대사(張大使)는 극진히 환대(歡待)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주연(酒宴)이 한창일 무렵 국사(國使)가 찾아와 김명(金明 817~839 민애왕)이 왕(王 : 희강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반란(反亂)을 전하니 장대사(張大使)는 군사(軍士) 5000명을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할 수 없다!! 하니 공께서 평동장군(平東將軍) 김양(金陽 808~857 신라 왕족 정치가 태종 무열왕의 9세손 이찬 주원(周元)의 증손자) 등과 군사를 나누어 출정(出征)하여 그해 12월 무주철치현(武州 : 현 나주남평)에 이르러 김명(金明)의 군사를 격멸하고 도성(都城 : 경주)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어 839년 1월 달구벌(達丘伐 : 현대구)에서 민애왕(閔哀王 : 金明)이 거느린 정부군을 격파하고 왕(王 : 민애왕)도 주살(誅殺)하니 이로서 경주(慶州)의 왕성(王城)을 수복하고 그해 4월 김우징(金祐徵 : 신무왕)을 즉위케하니  신무왕(神武王)이다.   왕은 장대사(張大使)를 재상(宰相 : 중앙정부의 최고벼슬)으로 삼고 공은 이척찬(伊尺飡 : 신라때 제2등급)에 오르고 장대사의 뒤를 이어 청해진(淸海鎭)을 지켰다.
  840년(문승왕2) 장상(將相)으로서 대각간(大角干: 신라 17관등과는 별도로 최고관등)이 되어 시림군(始林君)에 봉군되었다.
  851년(문정왕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현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림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부인은 아찬(阿湌) 김균정(金均貞 : ?~836 원성왕의 손자 신무왕의 아버지)의 딸이다. 
사적(事蹟)이 기록(記錄)에 나타난 것은 당서(唐書)와 변천문집(變川文集)과 삼국사기(三國史記)로 공의 무용(武勇) 충의(忠義) 치환(致宦) 득명(得名)등 네가지 기록이 분명(分明)히 증거(證據)가 있고 천유여재(千有餘載)가 지난 오늘도 충의(忠義)에 뜻이 있는 선비들이 그 주역정국(誅逆靖國)의 일을 알고 있으며 청해진(淸海鎭)의 본영(本營)이던 장도(將島 : 사적 제308호)에 있는 당묘(堂廟)에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등 양장군(兩將軍)과 삼별초난(三刷抄亂)의 송징장군(宋徵將軍)그리고 혜련대사(惠蓮大師)등 네분을 완도(莞島)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어 신패(神牌:신주의 뜻)를 모시고 "음력 정월 보름날" 에 주민(住民:장좌리)들이 성대(盛大)한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공은 1997년(정축)에 정부(政府)에서 표준영정(標準影幀) 제작(製作) 대상인물(對象人物)로 지정(指定) 되었으며 통일신라(統一新羅)에 많지 않은 위충(偉忠)과 훈공(勳功)은 일세(一世)에 빛난 명장(名將)이다.  1997년 9월 문화체육부(박도86321-751)에 서 표준영정(標準影幀) 제작 인물로 지정되었으며 동년 11월 경주정씨중앙종친회 주관으로 청해진(淸海鎭 현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기적비(紀蹟碑 : 정년장군기적비)를 세웠으며 1999 년 11월 경주 백운대 시조묘역에 사단(祀壇)을 설치하였고 2006년 10월 전승비(戰勝碑)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죽석리에 세웠고 또 추경사(追敬祠)에 배향되었다.


http://chungfamily.woweb.net/zbxe/?mid=EditPersonData&strPersonID=0100131002

정종은(鄭宗殷) 

 생몰년미상, 신라 장군(將軍) 년(年)의 현손으로 이부시랑(吏部侍郎) 목(穆)의 손자이며 병부상서 손국(遜國)의 아들로 좌언간관(左言諫官) 급벌찬(汲伐飡)을 역임하였으며 경애왕(신라 55대왕 ?~927)때 피화(被禑)로 인하여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부인은시중(侍中) 설득언(薛得彦)의 딸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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