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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身分계급이 지배했던 社會風潮 
  
이쯤해서 본론(本論)을 잠시 벗어나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당시의 사회환경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이같은 환경을 밑바탕으로 함으로해서 사천문중 선조들의 사회적 위치나 보존돼온 가풍(家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누구나 알다싶이 유교(儒敎)사상에 의해 「사. 농. 공. 상(士. 農. 工. 商)」이라는 틀에서 개인이나 가문의 사회적 위치나 가치를   평가하지 않았던가. 
현대적 가치관에서 보면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개인이나 집안을 평가하는 식이었다.

여기에서 △사(士)는 하늘의 뜻을 읽어 세상의 도리를 밝힌다는 점에서 제1의 위치에, △농(農)은 하늘 아래인 땅을 갈아 곡식을 수확한다는 점에서 제2의 위치에, △공(工)은 땅이 낸 산물을 가공한다는 점에서 제3의 위치에, 그리고 △상(商)은 천하(天下)에 보태는 것은 없으나 물건을 유통시킴으로써 인간 삶을 보다 풍족하게 한다는 점에서 제4의 위치를 각각 부여했던 것이다.    그 외의 업종 종사자는 그 위치마저 자리매김하지 않고 이른바 「천민」 이라는 개념에 포괄시켜 버렸던 것이다.

사. 농. 공. 상 가운데서도 유독이 하늘의 뜻을 읽는 사(士)에 대해서만「양반」이라며 우대했고, 나머지는 「평민」또는 「상민」으로 평가해 「천민」과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양반의 위치를 유지 또는 확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고, 또 대가를 치른다고 해서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도적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한 개인의 인품이나 능력이 뛰어났다손 치더라도 출신성분이 낮으면 양반으로의 진입이 어려웠고, 양반의 후손들은 이 위치를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반 계층 또는 양반 행세를 하는 일부 인사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갓이나 두루마기 등 의관을 갖추려 했었고, 굶어도 남 앞에서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등의 허세를 부려야 했던 것이다.

또 소나기가 쏟아지는 등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뛰지 않고 팔자걸음을  걸어야 했는가 하면,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칠 수 없다는 등의 가식적인 행동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른바 「양반체면」이 바로 이같은 허세를 불러왔던 것이다.

실례로 조선시대 중엽의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쫓겨 임금(선조)을 따라 임진강을 건너야 했던 조정의 높은 양반들은 상놈들이 하는 뗏목을 만들 수 없다는 명분으로 강주변을 맴돌다 왜군의 총칼에 쓰러져 죽기도 했다. 
쫓기는 과정에 하인들이 뒤따를 수 있었겠는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도 양반체면이 우선시되는 사회풍조가 조선시대를 뒤덮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후에 실학(實學)이 대두되면서 어느 누구던 낫으로 주변의 나무나 대를 자르고 뗏목을 만들어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는 논리가 나왔지만 전국 농촌사회로 까지 파급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다보니 양반가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족보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면서 「문중 결속」과 「가풍 보존」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반과 천민의 구분은 조상들이 양반 성씨나 족보를 가진 선비였던가, 아니면 족보없이 막노동으로 살아온 조상의 후예였던가를 기준으로 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어느선이 양반이고 천민이냐는 확실한 기준보다는 사회인식 속에 구분지어진 계층 개념이라고나 할까.
비록 양반의 후예일지라도 인륜을 벗어난 처신이나 행동을 할 경우에는 천민 또는 상놈으로 취급해 버리는 사회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양반(兩班)이란 뭣인가.
임금이 주재하는 어전회의 석상에서 동쪽 반열(東班)의 문관(文官)과 서쪽 반열(西班)의 무관(武官)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 아니던가.  즉 동반과 서반을 일컫는 것이다.

문관이나 무관 등 「관(官)」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정부가 제정한 제도적 장치에 들어가야 했고 이에는 글을 알아야 했다.   글을 아는 계층을 곧 선비(士)라 했다.

설령 글을 안다손치더라도 출신성분이 천민이라면 과거시험 등 제도적 장치에의 진입이 불가능해 양반계열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과거시험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폐지됐다.)

비록 가구수가 얼마되지 않는 시골마을일지라도 양반가의 후손들은 조상들을 내세우며 양반체면을 지키려했던 것이고, 또 이것이 사회에 먹혀들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 이같은 신분의 증거물이 「족보」였다.

반면에 천민 또는 상놈은 소나 돼지를 잡거나 고리짝 등을 만들어 생계룰  유지한 백정(白丁), 짐승 가죽을 다루는 가파치, 재주를 부리며 전국 각지를 떠도는 광대 등 천하다고 규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당자나 그 후손들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결혼 역시 양반가는 천민 또는 상놈을 피하면서 「혈통」을 그 이유로 내세웠던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보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인데도 이같이 지탱하려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혈통유지」가 국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같은 신분계급은 대체적으로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 등 혼란기와 함께 서양문물이 들어옴으로써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개병(皆兵)제도에 의해 청년이면 누구나 군대를 갔었고 먼저 입대한 천민의 자식이 늦게 입대한 양반의 자식을 호령하는 명령체제, 그리고 산업 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도시로의 인구이동 등에 의해 양반과 천민의 구분은 그 흔적만을 남긴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아는 어느 중견기업의 李사장은 어릴적 시골마을에서 양반집 후손으로 자랐다. (1970년대 초)
그는 군 제대후 홀몸으로 상경, 일자리를 갖지 못해 떠도던중 배고품을  참지 못해 부잣집 담을 뛰어 넘으려 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양반집 후손이 굶어 죽을지언정 도둑질을 해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되돌아선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이때는 부모님이 들려주던 「양반」이라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 눈물이 쏟아졌고, 실컷 울고 났더니 배고픔도 가시었다고 했다.

양반이라는 정신적 가치관이 곧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도둑질을 못하게 한 것이고, 또 이 자부심이 성공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고도 했다.

1970년대 초까지도 국민들의 뇌리속에는 「양반」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짧은 하나의 사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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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와 「하십시요.」의 차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천문중 후손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양반과 상놈과의 차별이 어느 정도 였던가를 필자의 경험으로 실례를 하나 들어두고자 한다.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필자는 1950년대에 사천군 곤명면 정곡리(완사)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어느 정도 돈을 번 후 2차 대전 말기 일본 국내에 쏟아지는 미군들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고향이었던 구호리보다 「완사」라는 곳으로 귀국한데 따른 것이다. (1944년) 

이곳은 주변 각지의 자연부락을 품은 초등학교가 있고, 5일장이 서는 곳이었다.   주변지역의 교통 중심지이기도 했다.   인근에 살았던 50대 초반의 한 백정은 소를 직접 도살, 시장통에 상점을 두고 쇠고기를 팔았었다. (현재의 정육점과는 다르다.)

그런데 필자의 어머니는 제사(봉제사 6位)때만 되면 쇠고기를 사오도록 심부름을 시켰다. 유독 초등학생이었던 필자에게만 시키는 것이었다. 한번은 짜증이 나서 못가겠다고 버텼더니 "너가 가야만이 쇠고기를 보다 많이 사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가서 그 백정에게 "쇠고기 한 근 뜨게"라고 하면 시원찮은 부위(당시는 부위별 등급이 없었다.)에 그 양도 적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상놈인 백정에게 존댓말을 쓸 수 있겠냐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대신에 초등학생인 필자가 가서 "쇠고기 한 근 주십시요"하면 존댓말에 감동된 그 백정은 보다 좋은 부위나 많은 양을 덤썩 썰어 준다는 논리였다.  시골마을에서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양반과 상놈과의 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한 것이다.

하기야 현재도 대대로 내려온 양반촌(경북안동 등)에서는 이 「양반」개념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천민」개념은 사라졌다.  안동 양반촌의 경우 새로 부임한 기관장들은 양반 집안의 웃어른께 취임인사를 가야만하는 전통이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양반촌의 후예들은 바깥 세상이야 어떻게 변하던 아랑곳하지 않고 대대로 내려온 전통가문의 기치를 지금도 붙잡고 있는 것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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