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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여년 전 泗川지역에 터전 
  
과거(過去)로의 탐색은 엄청나게 멀고, 목적하는 바를 다 잡아 낼 수도 없는 것이다.
논리를 비약시키면 鄭氏라는 혈통도 지백호 원조 이전 단계부터 밟아 와야 하는 것이고, 끝내는 인류탄생 단계까지 가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류탄생이 6백만년(지구나이 46억년) 전이라 했으니 어떻게 찾아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백호 원조를 상계(上系)로 하고, 고려시절 이후 전라도 순천지역까지 내려온 18세기 중엽까지의 선조들을 중계(中系)로 하여 혈통의 맥을 짚어 온 것이다.

혈통도 진화론의 원리에 입각, 조상의 지혜나 슬기, 또는 인지력(認知力)이나 통찰력(洞察力) 등을 따라 진화해옴으로써 그 후손들도 대체적인 공통분모를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속담대로 왕대(大竹)밭에서 왕대가 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鄭氏라는 씨족의 맥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면서 그 가치를 보존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혈통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소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발전은 DNA(유전자)를 통해 2천여년 전에 살았던 크레오파트라의 혈통까지도 알아낸다고 하지 않는가.

특히 당해 조상이 한곳에서 대대로 붙박이로 내려왔다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 당해 조상이 당해지역에 이주한 시기나 계기등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후손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한 집안에서 분가해 나갈 경우 대부분 인근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나 계기가 큰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천문중의 혈통은 이 형태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먼 지역(전남 순천에서 섬진강 동쪽의 경남 사천)으로 이주해 왔는데도 그 기록이 없을뿐아니라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마저 듣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의 섬진강 다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7년 7월에 건설됐다. 
그 이전에는 뱃길이어서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사천문중 후손들이 놓져서는 안될 직계 맥을 짚어보자.
여기서 직계 맥이라 함은 사천지역에 묘소를 두고 그 후손들이 제례의식을 갖추면서 흠모의 정을 내보이고 있는 선조들을 일컬음이다.

앞에서 잠간 얘기했듯이 사천문중 후손들의 혈통 이동도는 어느 한 지역에서 뻗어 내려온 붙박이가 아니라 2천2백여 년에 걸쳐 한반도 동남쪽(경주)에서 중앙(개성,한양)으로, 그리고 서쪽(남원)에서 서남쪽(순천,사천) 으로 뻗어나온 혈맥으로 돼있다. 

남원이나 순천에서 뻗어난 가지만도 호남일대는 말할 것 없고 마산, 통영 등 많은 지역으로 뻗어나 있어 일일이 기술할 수 없을 정도다.

사천문중의 경우 지금(2010년)으로부터 220여년 전에 지백호 원조의 63세손인 익근(翼根)선조가 사천지역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그 후손들이 늘어나「문중」으로 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래서 사천문중 구성원은 7∼8대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 할아버지를 뿌리로 하는 후손들인 것이다.
그 후손들은 2∼3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큰집 또는 작은집이 되는 것이고, 형제들로서의 유전인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익근선조가 사천지역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근거는 그의 묘소가 사천지역에 있을뿐아니라 사천지역 후손들이 제례의식에서 모시는 조상들 가운데 가장 윗대로 자리매김돼 있는데 따른 것이다. 
익근선조의 부친을 비롯한 그 윗대의 조상들은 전남 순천의 명말산 산록에 모셔져 있다.
익근선조는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 그리고 그의 부인 전주李씨는 사천시 사남면 초전리에 각각 그 묘소를 두고 있다. (족보 기록)

익근선조는 치원(致遠:武科)선조를 아버지로 1761년(영조 임오) 태어났다.   청.장년기였던 30세 전후로 하여 사천지역에 터전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하면 지금으로부터 220여년 전에 경주鄭氏 문헌공파가 처음으로 사천지역에 싻을  티운 셈이 된다.

족보 기록에 의하면 56세손의 열(悅)선조 (통덕랑공파)이후 익근선조(63세손)의 직계조상들은 거의가 무과(武科)계통의 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직계조상들은 대부분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관직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감 이상의 벼슬을 했다면 엄연히 기록돼 있을 법도 한데 단순히 「무과」또는 「선전관」으로 처리해 둠으로써 벼슬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 후손들이 족보관리에 소홀했었기 때문일까?
아뭏든 익근선조 이전의 직계선조들은 모두가 단순한 「평민」신분이 아니라 대대로 글 공부를 한 「선비」들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쳇말로 먹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서는 무과나 선전관으로서의 벼슬을  할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관직으로서 가장 낮은 「참봉」이나 「선달」만으로도 그 위세를 떨쳤고, 자랑거리로 내세웠던 집안들도 없지 않았다.

실제로 순천의 선조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임금에게 1천섬에 이르는 양곡을 자체조달, 헌상했던 기록도 있고 보면 순천지방에서의 선조들 위치나 가성이 어느 정도 였던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지금도 순천과 화순에는 옥계서원(玉溪書院:承復선조), 충장사(忠壯祠:林亨선조)등 선조들을 기리는 서원과 사당 등이 보존돼 있어 선조들의 활약상을 엿보게 해주고 있다.

사천문중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옥계공 종중의 후손들은 대부분 순천, 여수, 광양, 고흥, 장성, 곡성, 구례, 완도 등 전남지방과 하동, 함양, 통영, 마산, 사천 등 경남지방에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사천에 첫 뿌리를 내린 익근선조는 아버지인 치원선조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 익권(翼權)선조는 사천시 곤양면 가화리에 묘소가 있어 두 형제가 순천에서 섬진강 동쪽으로 이주해 왔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두 형제가 섬진강을 넘어 왔다는 얘기는 필자도 들었다.)

익권선조의 후손들은 곤양면과 가까운 하동(河東)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뻗어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비춰 하동지역의 경주鄭氏 문헌공파 집안들은 사천문중 집안들의 큰집이 되는 것이다. 후대에서 하동의 집안 후손들과 만날 경우 이 점을 상기시켜도 좋을 것이다. 사천문중 후손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천문중과 하동 집안과의 아무런 거래관계가 없고 서로를 알 수없는 상황이다. 이조말엽의 혼란기, 일제시대 등을 거치면서 인척으로서의 관계가 두절된 것이 아닌가한다. 220여년이란 세월 역시 인척관계가 떨어지는 요인이 되지 않았겠는가.

족보에 따르면 익근선조는 언선(彦善:64세)선조를 외아들로 두었다. 
(하동의 익권선조 역시 외아들(彦尙)을 두었다.)
언선선조는 임용(任容), 낙용(洛容), 필용(必容)등 3형제를 두었으나 첫아들인 임용(65세) 선조만이 세호(世鎬)와 영호(泳鎬)선조 등 형제를 둔 것이다.
낙용과 필용선조는 후손이 없다.

언선선조(1779년)는 정조 임금 시절인 18세기 말에, 그리고 그의 아들  임용선조(1801년생)는 순조 임금 시절인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선조들이다.    65세손의 임용선조가 순조 임금 시절에 66세손의 세호(1817년 字:士重)와 영호(1819년 字:士直)선조를 둔 것이다. 

첫째인 세호선조는 봉조(鳳朝:字.正鎬), 기조(麒朝:字.尙鎬), 순조(舜朝:字.  景鎬), 우조(瑀朝:字.永鎬), 동조(東朝:字.東鎬)등 5형제를, 그리고 둘째인 영호선조는 명조(命朝:字.命述)선조를 각각 둠으로써 그 후손들이 사천지역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사천지역에 처음으로 터전을 잡은 익근선조는 2대 동안 외아들 수준으로 내려오다가 66세손의 두형제가 슬하에 6형제를 둠으로써 그 자손들이 크게 번창한 것이다. 

따라서 사천문중은 문중조(門中祖)가 되는 익근선조를 모태로 언선선조와 임용선조, 그리고 세호선조 및 영호선조의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기성(基晟:70세손)조카가 다소 혼란(?)스럽던 족보를 기준으로 인터넷에 체계화 해둔 기록을 참고하면 그 직계 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67세손 이하의 세대는 비교적 족보에 정확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 청장년시절에 돌아갔거나, 후손이 없을 경우 족보에 등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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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에 나타나고 있는 혼선

사천문중의 직계 맥을 짚어내기 위해 여기까지 오기에는 수많은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밀림을 헤쳐야 했다.
홍수가 할퀴고 갔거나, 낙엽이 뒤덮여 그 길마저 찾기 어려운 미로도 있었다.  이 가운데는 발행 시기별로 다른 족보의 세대간 혼선, 또는 앞선 족보에 나타나지 않다가 후일 족보에 나타난 선조들의 벼슬자리, 생년월일의 미기록 등 세부적으로 정황파악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어느 전통가문의 족보들에도 나타나는 것이어서 어느 누구에게 탓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때로는 처음에서, 때로는 끝에서 더듬어 내리거나 올리는 수준에서 그 맥을 짚어왔다. 족보의 기록도 우리민족사와 마찬가지로 험난한 시절을 거쳐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이 같은 기록을 남겨둔 업적에 「혼선」이라는 단어를 용해시켜 버리자.
필자가 이제까지 짚어온 이 기록물에도 「혼선」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천문중의 혈맥을 짚어온 이 기록물은 그동안 발간돼온 족보를 근간으로 하여 필자가 단편적으로 모아온 자료, 기성조카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발품을 팔아 제공해준 자료 및 인터넷에 체계화둔 족보 등을 기준으로 했다.
특히 사천문중의 직계조상들 부문에 대해서는 1986년경에 발행된 「진주.사천지방의 경주정씨 문헌공파, 분포와 내력」에 그 근거를 두었다.

이 진주. 사천지방의 분포와 내력은 사천시 정의동에 살았던 69세손의 석래(奭來:필자의 장형)형님과 70세손의 기철(基徹:부산)조카와 기준(基俊:사천) 조카가 족보기록을 하나하나 점검, 체계화 해둔 것이다. 

총 60여페이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족보를 중심으로 한 시조나 직계 후손들의 씨계(氏系)를 밝혀둔 것이다.
이 기록물은 1988년의 문헌공파 대동보 이전에 발간된 것이었기 때문에 대동보와는 세대차이가 나고, 사천지역에 뿌리 내린 선조들의 흔적을 살피지 않아 「내력」의 성격이 다소 희미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88년의 대동보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선조들의 「벼슬자리」부문에 대해서는 일부 기록이 있어 이 글을 써나가는데 크게 참고가 되면서 이정표 역할을 하게 해주고 있다.
사천 문중조가 되고 있는 익근선조의 「추증벼슬」이 바로 그것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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