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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良景公이 만든 경주鄭氏 族譜 〓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혈통의 맥이 어디에서 비롯됐고,    어떤 흐름을 타고 왔는지 등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을 잡았다.

씨족중심의 「鄭氏」에서 지역중심의 「경주鄭氏」 그리고 인물중심의 「문헌공파」와 「옥계공 종중」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그 마디들이 새겨져 있음을 안 것이다. 
   
윗대를 살아간 선조들의 씨족계열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노력과정에는 크고 작은 내, 외부적 애로요인과 수많은 난관들도 있었을 것이다.
멍들고, 찢기고, 피흘린 등의 역사적 사실과 함께 개개인에 밀어닥친 생사의 갈림길이나 생활고 등의 위협 앞에서는 윗대 조상의 묘소마저도 잊게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다른 민족과 달리 우리민족은 대내외적으로 무려 9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난(亂)을 겪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지 않던가.   이 속에서 잃어버렸던 선대의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씨족의 「피속에 흐르는 열정」과 「혈맥을 잇고자 하는 열의」가 이 같은   어려움을 감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열정과 열의로 씨족의 맥을 놓지 않도록한 유일한 증거물 「경주鄭氏 족보(族譜)」의 유래는 어떠할까.
앞에서 잠깐 언급됐던 계림부원군 양경공 희계(熙啓:49세손) 선조는 이조 초대 임금인 태조의 등극(1392년)과 함께 나라를 일으킨 공로자에게 주었던 개국공신(開國功臣:39명)의 한 분이셨다.

희계선조는 경주鄭氏의 본원(本源)이 깊고, 오래 흘러왔음에도 세계(世系)가 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개탄하여 처음으로 「鄭氏족보」(3권)를 만들었다. 

경주鄭氏의 창보(創譜)가 되고 있는 이 족보는 역사적 사실 등에 비춰 「가승」(家乘:간단한 집안 계보 기록)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승은 현재처럼 체계화된 도식(圖式)이 아니라 서술형 문장에 10세 전후의 조상들을 대상으로 한 관직위주의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 개인을 기준으로 한 행장(行狀:평생의 행적) 형식은 아니었다.

우리민족의 경우 각 성씨의 원조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없고,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설상 구전 돼오던 내용들을 체계화시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왕족이나 호족들의 경우 역사 기록물 등에서 선대나 후대를 중심으로 가계(家系)를 짚어 나왔기 때문에 계대(系代)가 분명해지고 정확성도 높은 편이다.    인구수가 그다지 많지 않아 계보 파악이 쉬웠던데다 벼슬위주의 인물들이 세습적으로 이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족보는 윗 선조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던가를 서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체계적이고 역사적이며 정확히 기술되었는지 등에도 그 가치성을 부여 하고 있는 것이다.

희계선조가 1400년대 초에 작성한 경주鄭氏 창보의 경우 경주나 송도에 살던 일가를 대상으로 그 계대(系代)를 짚어 왔을 것으로 보여 그 정확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선대를 가공적인 인물로 하거나 미화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정확한 혈통을 근거로 가계를 잇고자 하는 마음이 창보작업의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시는 개개인의 인성(人性)이 현재처럼 영악스런 측면이 없었고, 순수했다는 것도 요소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실물은 없어 졌지만 역사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족보(가승형태)는  △1360년 경에 찬술된 서원鄭氏의 「정씨가전」(鄭氏家傳:목은 이색 기록)을 비롯 △1401년의 해주오씨(海州吳氏) 족보 △1423년의 문화유씨(文化柳氏) 영락보 △1454년의 남양홍씨(南陽洪氏) 갑술보 등이 있다.
실물이 있으면서 제일 오래된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로 서울대 규장각에 희귀본으로 있다.

우리 민족사에 족보가 등장한 시기를 짚어 보면서 경주鄭氏 창보의 가치를 재평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 같은 역사적 기록을 제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양경공 희계선조는 이조 태조가 등극한(1392년) 이후 내린 개국공신이었던 점에 비춰, 1400년 초엽에 창보작업이 이뤄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수많은 성씨들 가운데 경주鄭氏가 일찍이 족보를 만들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양경공 희계선조의 경우 어떤 곳에는 「개국공신」으로, 또 다른 곳에는 「좌명공신」으로 표기되고 있다. 조선시대들어 각 임금이 내린 28개공신 가운데 개국공신(태조)은 1392년, 좌명공신(태종)은 1400년이 된다.)    

안타깝게도 이 족보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으면서 후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족보기록에는 난리통에 불타 버린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이 족보의 흔적은 이를 기억하고 있던 선조들에 의해 거의 재생 됐고,  특히 1732년 임자 3권보(壬子三卷譜)가 나오면서 씨계(氏系)가 보다 확실해졌다.    이 임자 3권보는 1710년(숙종)경 무안(務安)에 사는 두일(斗一)선조가   몸소 조선팔도의 일가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성심으로 세계(世系)를 모은   자료와 구전 돼오던 양경공의 창보를 토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 후 60년이 지난 1792년(정조) 임자년에 각 지역의 일가친척들을 거의   망라한 8권보를 만듦으로써 이를 만든 선조들이 “숭조(崇祖)와 경종(敬宗)의  도(道)를 다하였다”고 술회하고 있을 정도다.

뒤이어 1834년 갑오 12권이 발간됐다.
이 갑오보에는 경주鄭氏 시조인 문정공 진후선조의 계보를 정확히 파악 하고, 그 후손들의 맥까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둔 특징이 있다.
즉 진후시조의 경우 ① 강릉김씨 족보에 김굉의 사위로 시호가 문정공이며, 부친이 극중(克中:검교정승)이고, 아들이 금실(金實:찬성사)로 나타나 있는 것을 비롯 ② 서울의 정전적(丁典籍) 집성보 가운데도 문정공의 내력이 기록돼 있고   ③ 고려의 사적(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도 시조의 시호와 직함이 분명히  기록돼 있는 점 등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이에 앞서 양경공 희계선조도 나름대로의 선계(先系)를 파악, 「진후」선조를 경주鄭氏의 시조로 그 맥을 세웠었다.

여기에 경주鄭氏 족보 내력이나 씨계(氏系) 확립에 따른 발자취 등 전반적인
내용이 함축적으로 기술돼 있는 “문헌공파 대동보 발간 취지문”을 요약해 둔다.  이 취지문은 가장 최근(1988년)에 작성 됐을뿐아니라 문헌공파의 씨계를 보다 잘 알고 있는 각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참여, 의견일치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성이 있다고 본다. 시사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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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공파 대동보 발간 취지문 (요약)
  
<경주鄭氏는 임자 3권보를 시초로 현재까지 10여차에 걸쳐 족보를 발행해 왔다.
그러나 각 파간의 견해 차이와 문중간의 아집으로 조상의 통일된 계대(系代)를 이루지 못했을뿐아니라 심지어는 파간의 항렬이 뒤바뀐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파별로 뒤바뀐 항렬을 기준으로 조상을 모셔온 셈이었다.  다행히 4파(문헌, 양경, 월성위, 평장)간에 상계(上系) 조상의 통일된 계대에 합의함으로써 수백년간 계속돼오던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차제에 통일된 계대를 확립, 후세에 또 있을지도 모를 말썽의 여지를 없애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 1987년 4월 문헌공파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문헌공파 대동보"를 발간키로 결의 했다.

이에따라 7월 각 문중대표가 참여한 전국대의원(60여명)합동회의에서 편찬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규약은 물론 임원 예산 등을 확정했다.

이에 앞서 우리는 33년(1955년) 전에 4파 합동으로 을미대동보를 발간했으나 통일된 계대를 이루지 못한채 항렬이 뒤바뀐 보첩이 됐고, 15년 전에 발간된 계축보(1973년) 역시 다수 종인(宗人)들의 불참 등으로 절룸발이 보첩이 됐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누보자에게도 알리는 것은 물론 한집도 빠짐없이 참여하여 주기를 바란다. (1987.8)

경주정씨 문헌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
위원장 정 성 균
        
         ① 보사 일정 : 1988년 3월 인쇄. 5월 배포
         ② 수단금(水單金) : 어른 1단 3천원
         ③ 보책 대금 : 6만원                           >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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