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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獻公派는 西.南海岸에서 번성 〓
  
「진후」를 시조로 하는 경주鄭氏는 그 후손들이 크게 늘어나고, 사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큰 벼슬을 지낸 인물들도 많이 나타나게 됐다. 사는 지역이 넓어지다 보니 같은 일가 일지라도 서로 만나기가 어려울뿐아니라 먼 윗대 조상들을 찾아뵙는 회수도 줄어 들 수밖에 없었다. 

큰 씨족 집단일수록 이 현상은 보다 심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되다 보니 보다 가까운 씨족을 중심으로 하여 그 가운데 큰 벼슬을 했던 선조를 내세운 「파」(派)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가지를 뻗친 것이다.   「파」는 일찍이 중국 도가(道家)의 무술분야에서 계통을 알리는 개념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를 족보에도 도입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유행이었는지, 후손들의 판단에 따른 것인지 등은 명확치 않다.

나무도 큰 둥치로 자라면 가지를 뻗치고, 큰 산맥도 지맥을 형성하면서 내려오듯이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수도 있겠다.  어떤 제도적 장치나 구속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당대에서 기치를 든 것이 아닌 후대에서 새로이 설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씨를 하사받고 본관을 부여 받았던 종래의 형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파벌이나 경쟁의식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분파가 이뤄진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晉州鄭氏는 8개파로 나눠진 반면, 羅州鄭氏와 醴泉鄭氏 등은  1개파로 내려오고 있다.)  이에 따라 경주鄭氏는 「진후」시조 이후 약 150여년이 흐른 후(문헌공파 기준) 7개파로 나뉘어지면서 각각 또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뤄 나갔다.

즉 지백호 원조의 △46세손인 현영(玄英)선조를 파조(派祖)로 한 문헌공파(文獻公派:1派라고도 한다.), △49세손의 희계(熙啓)선조를 파조로 한 양경공파(良景公派:2派), △44세손의 이기(奇)선조를 파조로 한 월성위공파(月城尉公派:3派), △42세손의 필(弼)선조를 파조로 한 평장공파((平長公派:4派)등으로 각기 새로운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밖에 충열공파(忠烈公派), 양영공파(良影公派), 충장공파(忠壯公派) 등이 있다.  (흔히들 1, 2, 3파를 경주鄭氏 3개파라 한다.)

어쨌던 늘어난 직계후손들이 가까운 윗대 조상들 가운데 높은 벼슬을   지냈던 선조의 시호를 중심으로 그 가지들을 뻗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사천문중은 1파인 문헌공파가 직계 맥이다.
「현영」파조는 「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고려시절 호부상서(戶部上書)와 수문전(修文展) 태학사(太學士)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했다.

※ 문하시중:문하성 장관을 일컫는다. 
문하성은 상서성, 중서성 등과 함께 정부 최고 의결기관인 3성 가운데 하나로 중서성에서 입안한 사안을 검토, 상서성에 넘기는 업무를 관장했다.    상서성은 문하성의 승인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사안이라도 공포하거나 법률화 할 수 없었으며 비록 임금의 칙령이라도 문하성의 검토 없이는 그 효력이 발생되지 않게 돼있었다.
그래서 문하시중은 임금 다음의 역활과 권한을 갖다시피 했다.
중국 한나라 때의 편제를 도입한 것으로 호족 또는 중신들이 임금의 권한 남용을 막고, 자기들의 권한 확보를 위해 제도화한 측면이 있다.  물론 임금의 경우 문하성의 검토 없이 특례조치로 명령을 내릴 수 있기는 했다.    

<양경공파의 파조인 희계(熙啓)선조는 조선 개국과 함께 나라를 안정시킨 개국 공신의 한분이셨다.
희계선조는 현영선조의 인품을 포함, 여러가지 요소를 감안 하여 현영파조를 제1파로 하는 "파" 개념의 씨족체계를 임금에게 보고, 승인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양경공파의 후손들은 현재 경기 연천, 파주지역 등에 그 조상들을 모시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큰 인물들이 많은데다 씨족간의 연대감도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족보 기록상에는 현영파조의 묘가 개성정산(開城鄭山)에 모셔져 있고,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에 그 단(壇)이 설치돼 있어 후손들이 파조의 영(靈)을 무성리에 모셨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사실 「현영」파조의 3세손인 진(震)선조가 그의 동서인 정극인(丁克仁)과 함께 당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서 전북 태인(현재 井邑)에 내려온 것을   시초로 사촌, 또는 일가친척들이 내려옴으로써 호남과 영남지방에 그 후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씨들이 당해 파조((派祖)의 묘소나 기일 등을 모른채 수백년동안 지나쳐 왔듯이 문헌공파 파조 역시 기록만 전해져 왔을 뿐 그 흔적을 파악하지 못한채 오랜 세월이 흘러왔다. 

그래서 문헌공파의 후손들은 호남의 태인에 단비(壇碑:조상의 묘가 유실 되거나 찾기 어려울 경우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 영(靈)만을 모신 신주(神主)격의 비석)를 세우고 현영파조를 추모해 오고 있는 것이다.
현영파조의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개성 또는 이북에도 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영파조의 손자(震)가 전북 태인으로 처음 내려왔기 때문이다.

현영파조는 고려시절에 활동했던 만치 이씨조선 개국 당시의 혼란기와  그 이후의 각종 외침 등에 의해 후손들이 찾아 볼 겨를을 갖지 못한데서  잊혀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영파조가 개성 정산에 모셔져 있는 점에 비춰 남·북이 갈라진 이후 남쪽의 후손들은 단비만으로 추모의 정을 표시하고 있지만, 북쪽에 있는 후손들은 잠들어 있는 묘소에서 직접 향을 피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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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영파조의 제단 비문 (요약)
<호남의 태인읍 서쪽 무성리 향도곡(香桃谷)언덕에 네개의 비석이 한줄로 세워져 있다.
서쪽제단이 문헌공 현영(玄英), 중앙이 월성군 종철(宗哲), 동쪽이 안숙공 종보(宗輔)이시다.
월성군과 안숙공 두분은 모두 문헌공의 아들이 된다.
여기에 안숙공의 정부인 벽진 이씨가 모셔져 있어 4位의 제단으로 돼있다.  이 4位의 산소는 송도(松都:개성) 정산(鄭山)에 있다는 것이 오래고,  먼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증거가 없으니 자손들이 추모의 뜻을 붙일 곳이  없었다. 1981년(辛酉) 후손 기성이 일가들의 뜻을 모아 제사를 올리고, 1984년   (甲子)에 보존회를 조직하면서 재정을 확보, 그 단을 설치한다. (중략)

안숙공의 손자인 진(震:병조참판)이 장광(莊光:단종과 세조)의 때를 만나 남쪽 무성에 내려와 대대로 살게 됨으로써 무성에 그 제단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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