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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商으로 맥이은 선조 이야기 
  
연좌제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다 싶이한 사천문중 선조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당시의 선조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주류를 이루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부를 축적해가는 형국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형제들이 많을 경우 숫자에 따라 나누었고, 대부분이 인근에 분가(分家)를 이루는 형식이었다.

사천문중 선조들은 「쌍둥이 사건」을 계기로 이같은 형식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특징이 있다.
외지로 나간 선조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선조들은 고향땅에서 근근히 생활해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67세손인 명조(命朝:字.命述 필자의 할아버지)선조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예(例)를 들어두고자 한다.
명조선조의 삶이 재산 몰수 후 동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의 생활상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명조선조는 쌍둥이 형제들의 손자벌이 된다.
그의 아버지 영호(泳鎬:66세손)선조 때에 재산을 빼앗긴 것이다.
영호선조의 형인 세호(世鎬)선조도 재산을 빼앗기긴 마찬가지였다.
세호선조는 봉조, 기조, 순조, 우조, 동조 등 5형제를 두었고, 영호선조는 외동아들 명조선조와 외동딸 등 남매를 두었다.

명조선조가 9∼10세였던 어린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재산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억울함의 후유증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조선조와 그의 누이는 일시에 고아가 된 것이다.

고아가 된 이들 남매는 큰집인 사촌형 집(세호선조의 5형제 중 어느 집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가축용 먹이인 「꼴」을 베어다 나르고, 집안의 잡일들을 거드는 일을 함으로써 먹고 자는 것을 해결했던 것이다.  당시는 현재의 가치관인 「배움」보다 「배고품의 해결」이 1순위였다.

어느날 명조선조의 누나가 진주 도동의 오(吳)씨 집안에 민며느리(장래의 결혼을 약속하고 사전에 시집가는 여자아이. 남편 될 총각이 어린데 따른 것으로 당시에는 낯설지 않은 풍속의 하나였다.)로 가면서 동생에게 들려주었다는 얘기는 지금도 필자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족보에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누나는 동생(명조)을 부엌으로  불러서는 "나는 비록 민며느리로 가서 먹고 자는 것은 걱정 없겠지만, 어린 너는 어떻게 살아갈지 가슴이 메인다."며 서로 부등켜 안고 울었다 했다.
심청이가 아버지인 심봉사를 홀로 남겨두고 팔려가던 때의 심정이 아니 었을까 한다.

민며느리로 갔던 이 누나의 아들과는 6.25동란이후까지 집안간에 왕래가 있었다.  필자의 둘째 형수님(해주 오씨)은 이 누나 아들의 중매에 의해 鄭氏 집안으로 시집오신분이다. (해방 후)  

홀로 남은 명조선조는 사촌형 집에서 성장, 장년기에 접어들어 행상(行商)길에 나섰던 것이다.  
즉 남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건어물이나 젓갈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내륙지로 들어가 쌀, 보리 등 곡식으로 바꾸어 해안지대로 나와 되파는 일을 했던 것이다.

사천에서 지리산 밑의 시천면 일대는 말할 것 없고, 첩첩산중으로 알려진 덕산 유덕골까지 들어갔던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는 교통이나 상설점포가 발달하지 않했던 만치 이같은 행상의 수익도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품유통의 주된 담당자 역활을 했던 이 행상은 전국적으로도 어느 정도 일반화돼 있었다.
1900년경에는 이들 행상의 숫자만도 73만여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이들 행상이 각 마을을 돌며 선동자 역할을 했다.   역사적으로도 보부상(褓負商)이라 불리어지는 이들은 개별 또는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상품유통뿐아니라 지역간의 소식을 빠르게 전달함으로써 관리들의 부패나 토호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역활을 하기도 했다.

직물, 장신구, 종이 등과 같이 부피가 작고 비교적 비싼 상품을 질빵에  짊어지고 다니는 「봇짐장수」를 보상(褓商)이라 했고, 소금, 젓갈, 토기 등 무겁거나 부피가 크면서 비교적 값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부상(負商)이라 했다.  명조선조는 등짐장수를 한 것이다.

이들 보부상은 전국 각지에 개척한 판로를 중심으로 후에 지게를 나귀로 바꾸고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는 등 단결력을 보이기까지 했다.

일제시대 들어 관의 견제를 받음으로써 그 세력이 약화했다.
조선독립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남강 이승훈은 14세때부터 유기행상을 한 보부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오늘의 두산그룹도 그 모체는 보부상(박승목) 출신이었다.    어쨌던 명조선조는 이같은 행상으로 장가들 정도의 돈을 모아 고향인 구호리 인근에서 결혼한 것이다.

부인으로 맞은 전주 李씨는 첫 중매에서 "남편 될 사람을 잘못 봤다."며 파혼 결정을 내리고, 두 번째 중매에서 鄭氏 집안으로 시집오신 분이라 했다.    명조선조는 3남 1녀를 둠으로써 또 하나의 일가(一家)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활은 넉넉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넉넉했더라면 당시 각 자연부락에 설치돼 있던 「서당」에 아들들을 보냈을 법도한데 이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3남 1녀 가운데 둘째인 필자의 부친(68세손.海同)만이 인근의 서당 문을 출입했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일제시대의 초등학교(소학교)가 설립되면서 자퇴해 버린 것이다. 

조선 총독부는 1895년 단발령을 내려 남자들의 머리를 깎게 했으나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자 2차 단발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깎는 청소년들에게는 「소학교 입학」을 추진했던 것이다.

단발한 청소년 중에서도 일정수준의 학문이 있을 경우 무료로 입학을 허용하는 이른바 장학제도를 병행 실시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필자의 부친은 연간 얼마씩 내야 하는 서당을 자퇴, 부모님들의 승낙 없이 사천초등학교(1회 졸업)에 입학했다.

부친이 단발머리로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본 필자의 할머니는 "자식 하나 버렸다."며 두다리를 뻗고 통곡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제의 단발령이 우리 국민들에게 준 충격이 어느 정도 였던지를 짐작케 하는 단면의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의 부친은 소위말해 신학문을 빨리 깨우치고 일본어를 했던 관계로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일본정부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독점적 특수회사)에 취직, 측량기사로서 인부들을 데리고 백두산 밑에까지도 갔었다.

백두산 밑의 어느 산골에서 수백년이 된 석청(石淸)을 발견, 솔가지로 연기를 피워 벌들을 쫓아낸 후 바위처럼 굳은 석청을 녹여 싫것 먹었다.  그리고는 인부들과 함께 석청에 취해 쓸어져 잠들어 버렸다는 얘기는 필자가 직접 들었다.   부친은 이후 일생(향년 77세)을 살아오면서 잔병치례를 하지 않은 것도 이 석청의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서 벌이가 시원찮다고 생각한 부친은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홀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후에 가족들을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오사카(大阪) 인근에서 운수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즉 말이 끄는 수레에 짐을 실으나르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귀국하기 전에는 말 20여마리와 20여명의 인부들을 거느리는 소규모의  운수회사로 발전했다.
이때 필자의 형님 두분을 동경으로 유학시켰던 것이다.

8.15 해방 한해전(1944년) 일본전역에 떨어지는 미군들의 공습을 피해  회사를 정리, 고향 인근의 완사(浣紗:사천군 곤명면 정곡리)로 귀국했다.  완사는 남강의 지류인 덕천강이 흐르는 관계로, 일본인이 둑을 막아 많은 농토를 조성했던 곳이다.

일본인 지주가 살던 큰 집과 함께 많은 농토를 사들여 인근에서도 큰 부자로 소문났었고, 부친의 이름을 모르면 곤명면 사람이 아니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적산」(敵産:적의 재산)이라는 이름 아래 집은 물론 농토의 상당부문을 몰수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뒤이어 일어난 6.25동란에서는 새로 마련했던 큰 집마저 불태워 버렸다. 

특히 셋째 아들의 학도병(진주고보 5년) 입대를 두고, 동네 좌익계들이 붙인 「군인  가족」이라는 명칭은 국군이 진출하기 전까지 산골로 피해 다니게 했다.  셋째 아들 (興來:20세. 필자의 셋째 형님)은 족보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채 학도병으로 입대, 하동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국가에서 주는 보훈연금은 부모님들의 여생에 용돈이 되게 했다는 의미에서 나름대로 효도를 한 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필자의 부친 부분과 이후의 집안일들을 이같이 메모식으로 기록해 두는 것은 이 역시 후일에는 역사속으로 파묻혀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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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감록(鄭鑑錄)이란?
  
한마디로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는 내용의 참언서(讖言書)다.  李씨는 망하고 鄭씨가 흥한다는 뜻이다.  정감록은 한자를 뜯어내거나 (破字), 속어나 변칙어 등으로 은유해서 장래를 점친 예언서의 대표격이다.  이 속에는 역리, 도참, 숫자, 색깔 등 여러가지 요소들을 끌어들여 예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묘사해 두었기 때문에 해석하기 나름에 따라 「맞다」고 하는 견해도 있고 「아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정감록은 "감"(鑑)이라는 鄭씨와 "심"(沁)과 "연"(淵)이라는 두 형제의 李씨가 산천을 답사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입각, 앞날을 내다보며 이야기하는 대화체의 글이다. 물론 파자된 한자로 은유해 두었다.

작가나 작성 연대없이 내용상의 예언시기를 고려때로 설정, 앞으로의 일들을 참언(앞날의 길흉을 예언)식으로 읊어 두었다.  여기서 주인공격의 "감"은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거울(鑑) 보듯이 세상일을 훤히 내다보는 사람으로 암시해 놓은 것이다. 

원문에는 사마휘나 제갈량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해 두었다.
각종 예언서가 그렇듯이 새로 발견됐다고 내세운 정감록 원본(필사본)만도 몇개 종류에 이르고 있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정감록 원문은 15편 미만이고 각 편의 길이도 길지 않아 그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30페이지 미만이다.  그래서 20세기 이후 한번씩 나타나고 있는 「정감록」이라는 책자 속에는 도선비기, 삼한 산림비기, 무학비결, 토정결 등의 예언서가 포함돼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감록이 얼마나 유명한 예언서인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파자 또는 은유법으로 표기돼 있는 정감록의 일부를 요약해보면...
「곤륜산에서 온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으나 평양은 천년의 운수가 지나 송악으로 옮겨진다.  송악은 5백년 도읍할 땅이나 지기가 쇠해 천운은 다시 한양으로 옮길 것이다.
여기서 난리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충신이 죽었으니 긴 밤중이 로다.  교룡(蛟龍:때를 만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을 비유)이 남쪽으로 건너니 어디로 가야할까.
  
금강산으로 옮겨온 맥의 운이 태백, 소백산(양백)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鄭氏의 팔백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 후 원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趙)씨의 천년 도읍할 땅이로다.」

이밖에 李씨의 5백년(어떤 원본은 3백년)후 鄭氏가 다스림으로써 태평성대가 된다는 암시나 「내 자손이 네 자손을 죽이고, 네 자손이 내 자손을 죽이리라」등 사회나 인간관계의 혼란상등을 비결식으로 예언해 두었다.

또 사람이 살수 없는 지역과 병화가 있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10개 지역(십승지)을 꼽아 두기도 했다.

이 예언서를 현 시점에서 보면 지나온 과거를 예언식으로 읊어서 맞춘 것이라고 판단되는 부문외는 뒤이어 일어난 큰 변혁부문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없다.    즉 임진왜란. 한.일합방, 남북분단, 6.25동란 등 예언에서 뭣보다 큰 요소가 돼야 할 내용이 전혀 없다.   조선시대 마감 후, 1백년이 지난 현재에 와서도 계룡산과 정씨의 인연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전 시점에서 鄭氏성을 가진 어느 기인(奇人?)이 과거의 맥을 근거로 은유법과 함께 참언식으로 예언함으로싸 목적한 바를 선동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정감록을 쓴 시점에서 지나온 과거를 예언식으로 읊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또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믿을 수밖에 없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라고나 할까. 

은유법을 씀으로써 이현령 비현령식의 해석이 「맞다」는 쪽으로 기울어   질수도 있는 것이다.
이씨 조선의 존립기간을 5백년으로 한 것은 조선 멸망후 고친부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재도 우리사회에는 격암유록, 도선비결, 남사고비결, 율곡비기, 송하비결 등 각종 비결서들이 최근에 새로 발굴된 것이라며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흥 또는 사이비 교주들의 술책 △역학자, 소설가, 출판인 등의 영리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세기적 예언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집(16세기 중반)도 이런 관점에서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유럽에서는 이 예언집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泗川문중 후손들만이라도 각종 예언서들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같이 쓴 것이다.

사실 「정감록」의 실체는 선조시절 “정여립의 난”(1589년:임진왜란 3년전)을 일으켰던 정여립(鄭汝立)이 작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선조실록)

정여립은 전라도 전주 태생으로 현감직의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는 물론 황해도 지역에까지 인맥을 넓혀 나갔다.
25세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배들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죽도선생」이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발상이 뛰어난 재사(才士)였다.   사색당파가 심각했던 선조 17년(1584), 동인(東人)세력으로 한때 관직에 몸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라도로 내려가 역모세력들을 모았다.

이때 「정감록」이라는 예언서를 만들어 승려 의연으로 하여금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두게 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이 정감록을 우연스럽게 발견한 것처럼 꾸며 신선이 내린 천서(天書)라며 정씨가 나라를 일으킨다는 내용을 퍼뜨리게 했던 것이다.

정여립은 전라도와 황해도에 규합된 세력을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승려 의연의 고발로 관군에게 쫒기자 아들과 함께 자살했다.  이 사건의 조사관으로 임명된 정철(西人)은 정감록을 사건의 큰 요소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 반란사건으로 1천여명의 선비들이 투옥되거나 참수를 당했다. (기축옥사)

참고로 각종 비결서에 나오는 일부 성씨들의 파자를 요약해 보면...

○ 鄭氏 
정감록에는 전읍(奠邑)으로 돼있다. 읍(邑)이阝(우부방)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비결서들에는 「일계사각방무수」(一鷄四角邦無手)로 나온다.  즉 계(鷄)는 닭이므로 십이간지에서 보면 닭유(酉)가 된다.
유(酉)아래에 일(一)을 더하고 사방(四)에 뿔(角)을 붙이면 (一鷄四角) 전(奠)이 된다. 
또 방(邦)에서 수(手)가 없다고 했으니 (邦無手) 우부방(阝)만 남게 되고 奠에 阝을 붙이면 鄭이 된다는 식이다. 

○ 趙氏   
이조 중종시절(1519년) 조광조 일파를 모함하기 위해 궁중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새겨 벌레들이 파먹게 함으로써 기묘사화를 가져오게 했던 趙氏는 「이십구일 주자지인」(二十九日 走者之人)으로 파자해 두었다.  음력으로 29일은 작은달(小月:肖)이 되고 이를 달리는 사람이라는 뜻의    주(走)에 얹으면 趙씨가 된다는 식이다.

이밖에 李씨는 목자(木子) 또는 목하(木下), 朴씨는 목인(木人)으로 파자해 두었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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