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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氏의 元祖는 「智伯虎」〓
   (정씨) (원조)     (지백호)
  
우리는 민족개념에서 보면 단군(檀君)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배달민족이다.    
이를 다시 분리한 씨족개념에서 보면 「지백호」(智伯虎)를 원조(元祖)   또는 도시조(都始祖)로 하는 정씨(鄭氏)의 후예들이다. (元祖 또는 都始祖를  原祖나  始祖 로 쓰는 집안도 있다.)

현재 한반도뿐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배달민족의 鄭氏는   거의 대부분이 「지백호」원조의 후손들인 것이다. (瑞山鄭氏,낭야鄭氏 제외) 
나무로 얘기하면 「지백호」원조는 거의 모든 鄭氏의 "씨앗" 또는 "원뿌리"가  되는 셈이다.
  
「지백호」원조는 삼국시대 이전의 진한(辰韓)에서 경주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을 다스리던 촌장이었다.
삼국사기 등 자료에 따르면 「지백호」촌장은 기원전 117년 경주 화산(花山)에 강림(降臨)한 것으로 돼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의 이 강림은 "알이나 박에서 태어났다."는 등의 신화와 같이 현재의 과학적 근거로 따질 일이 못된다.  그만치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신성시(神聖視)돼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취산진 지촌은 주변의 다른 5개 지촌과 함께 뒤이어 건설된 신라국  탄생의 모체가 된 곳이고, 지백호 촌장 역시 낙랑후(樂浪候:사후 태종무렬왕이 甘文王으로 승격 시켰다.) 칭호를 받을 정도로 나라탄생에 주춧돌 역할을 했다.  

다시 150년이 흐른 서기32년(신라 유리왕) 낙랑후 지백호 원조의 현손대  (玄孫代:손자의 손자대)에 와서 취산진 지촌은 본피부(本彼部:경주시 중심부)로 그 이름이 바뀌고, 왕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동충(東沖:지백호의 5세손)선조와 그 씨족들에게 "鄭 "이라는 성(姓:같은 혈통의 씨족을 표시하는 명칭)을 부여했다.   「동충」선조는 물론 그 조상들 역시 토후(土侯)로서의 지위를 갖고 나라 통치에 깊이 관여했다.��이라는 성(姓:같은 혈통의 씨족을 표시

후대에 와서 왕이나 임금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과 그 씨족을 중심으로 성(姓)을 부여한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한 점에 비춰, 鄭氏는 곧 사성의 시초가 되는 셈이다. 사성의 가치는 후대에까지 높이 평가됐다.

우리민족 개개인이 갖고 있는 성씨 모두가 사성이 아닐뿐아니라 그 수도  그리 많지 않다.
이때 부여받은 다른 5개 촌장의 성씨는 이(李), 최(崔), 손(孫), 배(裵),   설(薛)씨 등이다.
신라초기에는 박(朴), 석(昔), 김(金)의 왕씨 성과 6개 촌장의 성씨 등 모두  9개 성씨가 있었고, 그 외의 주민들은 씨족계열을 표시하는 성씨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성씨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지 않았고, 4세기 들어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성씨가 유입됐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반도 민족이 독창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중국문화와 접촉하면서  성씨를 사용했다는 얘기다.  성씨를 사용함으로써 「백성」(百姓)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됐다.

고구려나 백제초기의 왕들과 신하들의 성씨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성씨에 대한 개념이나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시대적 상황이야 어떠했건 한반도에는 신라초기에 씨족계열을 표시하는   왕족의 3개 성씨와 호족의 6개 성씨가 있었다는 것이 역사기록이나 당해  씨족들의 대동보(大同譜)등에 나타나 있다.  이에 비춰 鄭氏는 한반도 동남쪽에 일찍이 자리잡고 살아왔던 선주민 (先住民)의 후예들임이 분명하다. 한반도의 원주민인 셈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들어 기록으로 나타난 대동보나 족보 이전의 1천여년동안 鄭氏라는 씨족의 맥(脈)이 어떻게 정통적으로 내려왔을까.  해석하기나 연구정도에 따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사실(史實)에 입각한 정황으로 두가지만 제시해 보려한다.

그 하나는 당시 씨족 또는 부족사회에 하나의 신앙처럼 내려왔던 「조상 숭배 정신」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숭배정신 속에는 현대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속(巫俗)이나 미신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조상을 멀리하면 죄를 받는다.」등 등...
조상숭배는 제례의식(祭禮儀式)을 치루는 것으로 그 정신을 내보였다.
이 의식에는 부모를 비롯한 상위세대의 조상들을 열거하거나 기억해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에 같은 씨족계열의 후손들은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삶의 도리로  생각한 것이다.

현재와 달리 당시에는 같은 씨족들의 대부분이 인근에 부락을 형성하며   살았을뿐아니라 후손들 역시 많지 않아 제례의식에의 참여가 보다 쉬웠을 것이다.    인구측면에서 보면 고구려, 백제를 흡수한 통일신라의 총 인구는 3백만명 미만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인구조사도 없었고, 인구에 대한 역사기록도 찾기 어렵지만    신라말 이후 5백년이 지난 조선국(朝鮮國) 개국 당시(1392년)의 총 인구가 550만명 정도였다는 것을 추정 근거로 하고 있다.
이같이 인구수를 제시하는 것은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인구나 鄭氏의   씨족이 모여 살던 경주의 인구수가 어느 정도 였던가를 유추해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인구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씨족간의 관계나 사회적 여건 등에  비춰 그 혈통도 순수히 내려왔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하나는 신라의 정치 또는 사회제도들이 철저히 골품제(骨品制)에 의해 운영돼 왔을뿐아니라 이의 세습(世襲)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성골(性骨) 및 진골(眞骨), 그리고 1, 2, 3... 품(品)등 혈통에 의해 설정된 품격((品格)을 받지 않고서는 큰 벼슬이나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여기에 당대의 품격이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제도여서 조상을 무시하고  어떻게 자신의 품격을 받거나 후대에 물려 줄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지백호」원조 이후 3백여년동안 그의 후손들은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등의 품계(品階)를 갖고 평장사(平章事:정2품,총리격)나 대장군(大將軍:무관의 으뜸) 등의 직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대동보 등에 나타나 있다.
鄭氏는 이 같은 요소들이 크게 작용함으로써 그 맥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순수한 혈통을 이어온 것이라 하겠다.  
  
현재의 보학(譜學) 연구자들은 기록된 것만을 근거로 고려 4대 광종    (光宗:958년)때 과거제도가 처음 시작되고 17대 인종(仁宗:1136년)때 과거 시험지에 증조(曾祖)까지 표시토록 하는 제도에 의해 명문벌족(名門閥族)에서 앞 다투어 가승(家乘:집안의 역사적 사실을 적은 책)을 만든 것을 족보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가승(家牒이라고도 한다.)은 많아야 상위 10대 선조까지를 대상으로 하되 그것도 벼슬을 기준으로 한 서술형이었다.  현재까지 그 당시 만든 가승이나 가첩이 전해져 내려오는 집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를 기준으로 각 집안의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며 짚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부식은 정지상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대학자로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정지상을 제거하고, 이에 항거한 묘청의 난(1123년)을 평정한 이후 모든 대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던 권력가였다.
왕(17대 인종)으로부터 사기(史記)편찬을 지시받고서는 각계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자료수집에 매달리게 했던 것이다.  이 전문가들은 신화적 설화(神話的 說話)나 그 지방의 주민들로부터 구전   (口傳)돼 오던 사실을 기록에 올렸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60여년 전 일이다

이 전문가들은 사실규명이 어려운 부문에 대해서는 「신화」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와 과학적 규명이 어려운 인공물 등에 대해 「불가사의」라는 이름으로 처리해버린 경우와 같다고나 해야 할까.

우리의 뿌리가 되는 지백호 원조의 「강림」부문에 대해서도 이런 점을  감안해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본다.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을 미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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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후 지백호 원조의 묘비명 요약 (후손 東暉 지음)
  
  <경주시 남쪽 30리 거리에 노곡동(내남면)이 있다. 노곡동 뒷쪽의 북쪽으로는 경주남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있고, 여기에 백운대(白雲臺:남향)가 있다.    백운대는 앉은 호랑이에 웅크린 용처럼 생긴 지형이다. 
  백운대 위에 있는 10여기의 큰 산소는 봉분의 높이나 묘역의 넓이가 왕릉  못지않아 이 지방 사람들은 경주鄭氏 시조무덤 이라고 한다.
�   경주鄭氏 시조무덤 이라고 한다.
2천여년동안 비 바람과 각종 재난이 있었음에도 유독 이곳 백운대의 산소만은 그대로 보전돼 있으니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너무 오래되어 위아래의 많은 산소 중 어느 묘가 시조의 산소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어 후손들은 단비(壇碑)만을 세우고 시제를 올려온지 수백년이 지났다. 

1987년 봄, 모든 鄭氏 일가들이 모여 산소를 대대적으로 정화(淨化)키로  함과 동시에 시조 낙랑후의 산소를 정(定)하기로 했다.  산세나 족위(族位:가족의 장사법)등 여러 사항을 반영, 제일 위의 산소를   낙랑후 지백호 묘로 하여 석물(石物)을 갖춘다.  < 이하 낙랑후의 열력(閱歷) 생략>  

◎ 낙랑후 지백호의 시제: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경주지역에 가는 후손들이 있다면 이를 근거로 시조묘소를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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