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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連坐制에 따른 집안의 쇠퇴 
  
(다음에 서술하고자 하는 집안의 쇠퇴부문에 대해서는 필자 어머니의 얘기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어머니 역시 외할아버지가 직접 보고 들려준 얘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1898년생으로 구호리 인근의 가산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 鄭氏 집안으로 시집오신 분이다.
대원군이 사망하기도한 해여서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에 태어난 것이다.

밀양 박씨였던 외할아버지는 당시 백마(白馬)를 타고 인근부락을 넘나들 정도로 양반가의 후예로서 나름대로 위력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비록 서당이나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한글(언문)을 알아 삼국지나 홍루몽 등을 읽고서는 주변의 아낙네들에게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기도 했다.    밭일이나 논일을 할 적에는 삼국지의 부문부문을 얘기해주는 것으로 삯일하는 아낙네들의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1919년 3.1운동 당시에 가산리 인근의 젊은 아낙네들을 모아 사천군청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얘기도 들었다.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이 몸에 배였던 분이기도 했다. 

60대 이후에는 불교에 심취, 보살로서의 불경 읽는 것을 낙으로 삶았다. 향년 89세.    구호리 鄭氏 집안의 「쇠퇴 계기」에 별다른 허구성이 없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어머니의 부분적인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잠간 설명했지만 "조창"(구호리) 인근에 하나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사천문중 선조들은 부유정도나 그 위세면에서 주변 부락에서도 상위그룹에 속했다.

유추하건대 鄭氏 집안의 가족들 대부분이 조창을 위주로한 각종 업무에 종사했을 것이고, 양반가의 후예들로서 보이지 않는 사회적 후광이 뒷받침 됐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구호리 문중에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기록된 족보만으로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65세손인 임용선조의 두 동생, 즉 낙용과 필용 선조만이 후손이 없는 것으로 돼있어 이 두 선조가 쌍둥이 형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추정이 맞다면 쌍둥이 형제는 사천지역에 처음으로 터전을 잡았던 익근선조의 손자들이 된다.
사천지역에 터전을 잡은 이후 9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순조 임금)에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다.

쌍둥이 형제는 잘생겼던데다 체격도 우람해 남자다운 기풍이 역력했다.   
시쳇말로 쾌남형(快男形)과 호남형(好男形)을 두루 갖춘 청년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얼마나 걸출했던지 흰 두루마기 자락을 흩날리며 이웃 부락을 오갈 때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해변가의 큰 바위들을 한 아름에 집어던져 주변의 청장년들에게 그 힘을 내보이기도 했다.
사리에 어긋난 행동이나 나쁜 짓을 하는 청장년들을 호되게 꾸짖기도 하고 각종 시비거리의 판정관 역활도 함으로써 양반자제로서의 자부심이나 의협심도 내보였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힘이나 위력이 암암리에 작용, 주변마을을 편안하게 했던 것이다.

형제간에도 보이지 않는 질투심이 있었던지, 어느날 동네사람들을 불러 모아 형제간에 「버티기 시합」(强氣)을 벌였다.
형은 다듬이 방망이로 앞 정강이를 훑어 내리고, 동생은 뜨겁게 달군 윤두로 발바닥을 다리는 등의 참기시합을 벌였던 것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합이 었던 것이다.
얼마나 아프고 뜨거웠겠는가.
결과는 둘다 아프다는 표정 없이 무승부 판정을 받았다.
이 시합은 인근부락은 물론 현청이 있는 사천지역까지로 소문이 퍼져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이렇다 보니 동네 아낙네들은 鄭氏 집안의 쌍둥이와 같은 아들을 낳았으면 하는 염원이 있었고, 이 염원이 곧 착한 일을 한 아낙네에게 "너 쌍둥이 낳겠다."는 말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지역에서는 쌍둥이만 낳으면 집안이 크게 일어선다는 신화까지 만들어 냈다.
쌍둥이 형제가 당해지역에 미쳤던 위력이 어느 정도 였던지를 짐작케 하는 부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어느날 사천현감이 구호리 鄭氏 집안에 트집을 잡아 얼토당토않게 조곡을 갖다 바치라는 통보를 해 온 것이다.  (3南지방에 일어난 동학란의 계기가 됐듯이 당시에는 지방관리들의 착취가 심했다. 백성들이 관을 무서워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

이에 분노한 쌍둥이 형제는 사천현감에게 달려가 이의 부당성을 따지고 항의 했다.  그럼에도 현감은 "감히 누구 앞에서..."라는 호령과 함께 갖다 바치라는 얘기만 되뇌일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관이 한번 결정하면 그 논리성에 물러서는 적이 있던가. 옛날에는 어거지 논리로 부당성의 정도가 훨씬 심했다.   「횡포」에 가까운 일들이 비일비재했다고나 할까.
쌍둥이 형제는 그 부당성이 클뿐아니라 항의마저 먹혀들지 않게 되자 그 자리에서 현감을 주먹으로 때려누이고 짓밟아 버렸다.  그리고는 도망가 버렸다. 곁에 있던 포졸들도 졸지에 일어난 일이어서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일개 백성이 관의 현감을 짓밟는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려니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짓밟힌 현감은 펄펄 뛸 수밖에 없었고 빨리 잡아드려 사형시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전들로부터 흘러나온 이 소문은 사천은 물론 인근지역까지 떠들썩해지면서 큰 「사건」이 돼버렸다.

이러다보니 사회 여론도 △현감이 얼마나 부당하게 했으면 쌍둥이들이 그 같은 일을 저질렀겠느냐? 잘했다. △쌍둥이들의 지역적 평판이 정의감과  의협심으로 뭉쳐있다더라. △쌍둥이들의 성격으로 보아 2차 격습이 있을지도 모른다(후환)는 등 현감에게 불리한 쪽으로 형성돼 갔던 것이다.

또 상급기관에 알려지면 철저한 조사를 할 것이고, 조사결과는 현감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생기면서 이 사건을 유야무야 시키려 했다.  유야무야 시키려 했다는 증거는 도망간 쌍둥이 형제를 심하게 뒤쫓지 않았고, 또 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쌍둥이 형제들의 소식은 이후 鄭氏 집안에서도 접한 적이 없어 멀리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호리 일대의 주민들은 鄭氏 집안 사람들을 더욱 우러러  보았고, 집안 역시 사나이다웠다며 원망보다는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원인이야 어떠했건 간에 백성이 관의 영을 어기고 행패를 부렸다는 결과부문에 대해서는 그 죄값을 치뤄야 했다.
그것이 곧 쌍둥이 형제의 집은 말할 것 없고, 일가친척들에게 씌워진 벌금형이었다. 
연좌제(連坐制)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에는 연좌제에 의해 한 개인의 잘못이 있을 경우 당해 개인의 씨족계열 일가친척에게도 형벌을 내리는 것이 하나의 법으로 작용 했었다.   사색당파가 심했던 시절에는 멸족까지 당한 경우가 많았다. 사돈의 팔촌 까지도 화를  입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어쩌겠는가. 지상의 명령과 같은 관의 벌금형을 받은 鄭氏 집안들은 가가호호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엽전은 집집마다의 작은 방에 가득했었다.

벌금액이 어느 정도 였던지는 당시 구호리 일대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전설 같은 얘기를 통해서도 대략적이나마 짐작케 하고 있다.

즉 벌금형을 갖다 바치는 날의 풍경은 엽전을 짊어진 지게꾼들의 행렬이 10리(4Km)에 뻗쳤고, 사천들판(현재의 비행장)이 흰 옷을 입은 지게꾼과 구경꾼들에 의해 하얗게 물들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구호리에서 사천현청 가는 길)  이 흰 옷은 일제시대의 「흰 옷 금지령」(1895년)에 의해 점차 사라졌다.   가진 재산을 모두 빼앗긴 鄭氏 집안들의 형세는 어떠했겠는가.

어떤 선조는 실의에 빠져 이상 더 삶을 영위치 못한 경우도 있었고, 또 어떤 선조는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해야 했는가 하면 새로운 삶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족보의 보존이나 기록에 신경 쓸 여유가 있었을까.
이를 감안하면 사천문중 선대들의 족보기록은 다소 등한해질 수밖에 없었고, 세밀히 기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호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던 鄭氏 문중의 각 집안들이 이처럼 많은 벌금형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윤택」했었다는 점이다.   이 윤택의 계기는 농촌이나 어촌에서보다 「조창」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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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락한 양반문중 家聲
  
지금은 사천 비행장으로 흡수됐지만 그 이전에는 구호리에서 사천으로 가는 지름길이 이곳에 형성돼있다.
4∼5Km 거리에 우마차가 다닐 정도의 비교적 넓은 길이었다.

길목에 중선포라는 20∼30호의 마을도 있었다.
이 마을에 우리와 같은 경주 정씨라는 키 큰 장년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 장년은 어머니를 볼 때마다 "누님"이라고 부르며 구호리 문헌공파 문중에 입적시켜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 왔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지나치자 이 장년이 달려와 부탁한 건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안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뒤돌아선 어머니는 "경주 정씨라고 해서 구호리의 정씨들과 같을 수 있겠느냐"며 그동안 부탁해 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구호리 정씨들의 가세가 떨어졌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 장년 역시 옛날 구호리 정씨들의 위세를 고려해 입적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중에 얘기해 봤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받은 것 같은 인상이었다.

형제회 회원 가운데는 아는 분도 있겠지만 이 장년은 중선포 마을에서도 나름대로 위세를 떨쳤고, 그 동생은 5.16혁명 때의 공로로 서울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활동했었다.

중선포에 살았던 이 장년의 후손들도 모두 훌륭하게 돼 있을 것으로 믿는다.  비록 쇠퇴한 구호리의 경주 정씨 씨족들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가성이 인근에도 미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면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이제 와서 「부」나 「위세」가 어떠했던가를 살핀다는 것이 넌센스일수도 있겠지만 후대들에게 선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해준다는데 그  의미를 부여해 두고 싶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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