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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科급제 5父子 집안의 家勢 〓

앞의 비문에서 보았듯이 문헌공파의 「현영」파조는 종철(宗哲)선조와 종보(宗輔)선조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인 종철선조가 또 두 아들을 , 둘째인 종보선조가 4형제를 각각 두었다.  이 가운데 종철선조의 장손자인 진(震)선조가 한양에서 전북 태인(泰仁)으로 내려 온 것이다. (1402년) 
(앞의 비문에는 진선조가 종보(안숙공)선조의 손자로 돼있지만 족보기록에는 종철(월성군)선조의 손자로 돼있다. 족보기록을 따랐다.)

진(震)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로 세조시절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에 비춰 경주鄭氏 문헌공파의 후손들이 영,호남에 뿌리를 내린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인 15세기 초엽인 것으로 추정된다.

진선조의 아들인 계안(繼安)선조가 후에 또 하나의 공파(公派)를 형성할 정도의 큰 벼슬을 한 7형제를 둠으로써 전북지방을 중심으로 그 후손들이   크게 늘어났다.

현영파조의 둘째인 종보선조 역시 슬하에 둔 4형제 모두가 큰 벼슬을 지냈고, 그 가운데 넷째 아들인 인검(仁儉:사관원 좌사관)선조의 장손자 지년(知年)선조가 문과에 급제한 것을 비롯 그의 네 아들 모두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문과급제 5부자 집안의 가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지년선조는 중훈대부(中訓大夫:종3품)로 성균관 사예를 거쳐 단종의 폐위를 계기로 선영이 있는 남원으로 낙향했다.   지년선조는 진선조보다 50여년이 지난 1458년(세조 원년) 그의 삼촌 팔송(八松)선조와 함께 내려왔다.
사천문중은 지년선조 계열의 후손들이다.

지년선조의 문과급제자 네 아들은 효항(孝恒), 효상(孝常), 효종(孝終), 효본(孝本) 등이다. 
이들 역시 종철선조의 직계후손들과 마찬가지로 후에 또 하나의 공파(公派)들을 설정했다.
당시는 가문세력이 커지는 만치 후손들도 크게 늘어나고 사는 지역들도 넓어지면서 양반가의 사회적 대우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새로운 공파들을 설정한 종철선조 계통의 7형제와 종보 선조계통의 4형제 모두는 지백호 원조의 51세손들이다.  (본관조를 기준으로 할 경우 경주鄭氏의 득관조인 「진후」선조가 42세손이었기 때문에 42를 빼면 된다. 새로운 공파들을 설정한 51세손들은 경주 鄭氏의  9세손이 되는 셈이다.)

문헌공파 현영파조의 후손들이 또 각자의 공파를 설정했다는 것은 그들의 벼슬이 어느 정도였고, 또 그 후손들이 어느 정도 늘어난 것인지를 과히 짐작케 하고 있다.

족보상에 나타나고 있는 각 공파를 보면 지년(知年)선조의 4형제 모두가  △판서공파(判書:孝恒) △제안공파(齊安:孝常) △참의공파(參義:孝終) △감사공파(監司:孝本)등으로 분파했고, 계안(繼安)선조의 7형제 모두가 △순흥공파 △추파공파 △우후공파 △장흥공파 △죽산공파 △동래공파 △별제공파 등으로 분파했다.    또 집안별로 51세손을 파조로 한 △교수공파 △고산공파 △상서공파  △팔손공파 △좌윤공파 △추밀공파 등으로 나뉘어 졌다.
경주鄭氏 문헌공파 51세손들이 무려 17개 공파(2차 공파)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사천문중은 지년선조의 셋째 아들인 효종(孝終)선조를 파조로한 참의공파를 그 직계로 하고 있다.
효종선조는 이조 7대 세조 때에 승정원(承政院:비서실) 좌승지(左承旨: 부실장급)를 거쳐 예조참의(禮曺參義)와 오위장(五衛將) 등의 벼슬을 지내고 후에 좌리공신(佐理公臣:성종때 보좌의 공신 38인에게 내린 공훈명)의 녹훈을 받았다. 

앞에서 얘기한 17개공파의 파조들 역시 판서(判書)에서 현감(縣監)에 이르기까지 큰 벼슬을 지냈는가 하면, 학자로서 후배들을 양성해 인근에 명성이 높았던 선조들이다.

특히 효종선조를 2차 파조로 하는 참의공파의 경우 그 후손들이 크게 늘어나 문헌공파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족보 기록(1988년 편찬된 무진보 기준)에 따르면 참의공파의 후손들은   54세손(효종선조의 증손자)들어 또 하나의 공파들을 설정했다.

모두를 기록 할 수 없지만 사천문중을 기준으로 할 경우 옥계공파(玉溪公派:  3차파)가 새로 설정된 것이다.
(무진보에는 참의공파를 옥계공파라고도 하는 것으로 돼있다. 옥계공파가  참의공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옥계공파의 파조는 승복(承復:호 옥계)선조로 1520년(중종)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내(乃:의정부 좌찬성 추증)선조가 순천의 백만장자였던 왕침의  사위가 된 인연으로 순천으로 이사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승복선조는 문과 초시와 중시에 각각 수석으로 합격, 옥구현감,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고 어란진 첨사로 추자도에 출몰하던 왜구를 섬멸시킴으로써 인근은 물론 조정에 까지 그 가성을 크게 떨쳤다.
이후 웅천현감, 함흥판관, 함흥진관병마절제사 등을 지냈다. 

승복선조는 을사사화(1545년 명종:외척들의 싸움에서 소윤의 훈구파가 대윤의 사림파를 축출함으로써 1백여명의 신하들이 대옥사를 치른 사건)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 옥계정을 짓고 「옥계거사」로서 말년을 보냈다. (향년61세)

승복선조는 그 후 정조시절(1800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순조시절(1812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 도정의 벼슬을 각각 추증 받았다.
묘소는 순천 명말산(椧末山) 그의 부친 아래에 있다.

옥계공 승복선조를 이처럼 자세히 설명한 것은 옥계공파가 사천문중의 맥을 잡아가는데에 큰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계공 승복선조는 슬하에 6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아들이 없었지만 나머지 5형제들(55세손) 모두가 또 하나의 「공파」(4차파)를 설정, 씨족계열을 세분화 했다.

즉 둘째인 사익(思翊)선조를 파조로 한 참봉공파(參奉)를 비롯, 그 동생들을 파조로 한 성은공파, 매헌공파, 봉사공파, 태천공파 등으로 그 맥을 다시 세웠다.   사천문중은 사익선조(참봉공파)를 직계 맥으로 하고 있다.

이들 5개공파의 파조들은 55세손으로 종6품의 현감(3명)에서 종7품의 부사직, 종8품의 봉사직을 각각 지냈다.
후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어느 한 집안이 공파를 새로 설정하자 그 사촌 집안에서도 공파를 뒤따라 설정한 것인지? 아니면 족보편집상의 편의를 위해 조상별로 갈래를 잡은 것인지? 등 세분파한 이유는 명확치 않다.

여기에 다시 사익선조의 네 아들(56세손) 모두가 각각의 공파(5차공파)를 설정했는가 하면 그의 4촌 또는 6촌들도 공파라는 이름으로 그 가닥들을  잡았다.  족보 기록대로라면 승복선조 계열에서 56세손의 5차공파가 무려 11개공파에 이른다.  벼슬을 했거나 뛰어난 후손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5차파인 11개공파 가운데는 부친(5개파) 또는 고조(3개파)의 벼슬이나 이름을 이어온 경우도 있다.
어쨌던 사천문중의 직계 맥인 사익선조(참봉공파)의 네 아들은 각기  △참봉공파(惇: 부친파 계승), △곡구공파(빈), △직장공파(恂), △통덕랑공파(悅) 등으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사천문중은 이 가운데 통덕랑공파 열(悅)선조의 후손들이다. 

이외도 56세손들이 세운 공파는 △성은공파 △매헌공파 △봉사공파 △태천공파(이상 부친의 호) △충순위공파 △휘징공파 △희순공파(이상 고조의 호) 등이다.    통덕랑(정5품) 열선조는 후에 통정대부에 승정원 좌승지의 벼슬을 추증  받았으며 묘소는 순천시 연향동 명말산에 모셔져 있다.

이에 비춰 사천문중은 경주鄭氏에서 ①문헌공파→②참의공파→③옥계공파→④참봉공파→⑤통덕랑공파로 이어진 후손들이다.

통덕랑공파의 후예들은 대부분 경상도 사천을 비롯 김해, 통영 그리고   전라도 순천, 고흥, 승주, 곡성, 구례, 여수, 여천 등지에 그 윗대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현세들어 그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곁들여 경남 남해 창선에도 문헌공파 후예들이 하나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이 가운데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촉촌」을 소유하고 있는 후손(정영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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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 鄭氏란?  

흔히들 鄭氏를 「당나귀 정씨」라고 한다. 왜 일까? 
이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글씨체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鄭」자를 초서체로 쓸  경우 첫머리 글자인 여덟팔 「八」자를 「역八」자로 쓰기도 한다.
이 「역八」자가 당나귀의 귀처럼 양쪽으로 치솟아 있는데다 그 아래의 닭유(酉)자와 큰대(大)를 합친 부분이 당나귀의 얼굴처럼 생겼다 해서 당나귀 鄭  이라는 설이다. 오른쪽의 우부방을 방울이나 고삐로 보기도 한다. 

또 하나는 어느 마을의 부잣집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즉 옛날 어느 마을에 鄭氏라는 양반이 큰 기와집에 부자로 살았었다.
이 부잣집에는 항상 문전 걸식객은 말할 것 없고 사랑방에서 공짜로 먹고 자는 침식객들로 붐볐다.
이 침식객들 가운데는 각종 재주와 창(唱) 등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장과 붓글씨 등에 뛰어난 선비도 있었다. (대부분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경우여서 주인도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었다.)

어느날 붓글씨에 뛰어난 한 선비가 鄭氏내외분의 후덕함과 기와집의 웅장함  등에 감동, 「堂樂貴」(당낙귀:귀하고 즐거운 집이)이라는 현판을 하나 써주었다.  당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또 오른쪽에서 읽어나갔기 때문에 「귀낙당」이라고 써준 것이다.  워낙 달필인지라 주인 鄭씨는 이를 대문 밖에 내걸었고, 동네는 물론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그 집을「귀낙당」으로 불렀다.  그런데 후세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읽어가는 틀이 바뀌면서 그 집은 「당낙귀」로 바뀌었고, 동네 아이들은 주인이 정씨였던 만치 발음대로 “당나귀 정씨 집”이라고 했다는데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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