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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通政大夫가 삯티운 사천문중 
  
우리는 220여년 전 63세손의 익근선조가 사천지역에 자리잡음으로써 그 후손들이 늘어나고 사천문중으로 자리매김 돼온 과정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익근선조가 사천지역에 이주하게 된 계기는 뭣일까?
가마를 타고 왔을까? 아니면 지게를 지고 왔을까?
또는 갓을 쓴 양반이었을까? 아니면 무명옷을 입은 평민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궁금증은 후손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지 오래일 것이다.
이에대한 기록이나 전해들은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한 증거물, 익근선조의 「추증벼슬」을 중심으로 그 계기를 풀어 보려는 것이다. 
익근선조의 생전 벼슬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사후의 추증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文官의 正3品. 堂上官) 호조참의(戶曹參議:6曺중의 하나로 호구  (戶口)와 재정 조달업무 등을 맡았던 장관 부서의 차관 아래 직위)로 기록돼 있다.  그의 부인 전주李씨도 숙부인(淑夫人)의 품계를 추증 받았다.

익근선조가 1761년(영조.壬午)에 태어나 1824년(순조.乙酉)에 돌아가신 점에 비춰 순조시절에 벼슬을 추증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추증벼슬일지언정 당상관(堂上官)이라면 어전회의에서도 당위에 배석할  정도로 높은 벼슬이고, 이의 대칭 개념인 당하관(堂下官)과는 품격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시대였다.
생전의 벼슬위치나 관직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후대에서 족보나 대동보 등의 기록에 소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후에 내려지는 추증벼슬의 경우, 조선 중반기 이후에는 큰 벼슬자리에 앉은 후손이 당해 선조에 추증벼슬을 받도록 하는 사례들이 없지 않았다.  당해 가문의 전통과 위세를 내보이기 위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근선조의 후손들, 즉 사천문중의 선조들은 이 같은 위력(?)을  발휘할 정도로 큰 벼슬을 지낸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얘기하고자 하는 본론을 잠시 벗어나 사천문중 선조들의 벼슬 기록을 보면 익근선조의 증손자인 임용선조(66세손)가 참봉(參奉:종9품)벼슬을 했을 뿐이다.  문중 선조들이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거나 나가지 못한 이유들이야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중엽이후 휘몰아친 사색당파의 후유증 등을 고려, 관직에의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고, 조선 말엽의 혼란기에서 비롯된 사회적 기회상실,   또는 개인의 능력이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 등에 의해 관직 진출을 못했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영조 임금 이후 남인세력으로 지목받았던 영남인들의 경우 2백여년동안 중앙정치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말엽 세도정치를 했던 안동김씨들은 한양에 터전을 잡았던 김씨 들이어서  영남인이라 하지 않는다.)

또 참봉 이상의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겨 당파에서 비롯된 집안의 「씨 말림」을 예방한 경우도 있었다.
참봉 이상의 벼슬에 있었을 경우 사색당파 싸움에서 역적으로 몰릴때면 이유 불문하고 그 일가를 사형 또는 귀양살이로 형별을 가했던 적이 있었다.  이같은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가 사천문중 선대들에게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외동아들로 내려온 명문가(名門家) 또는 부잣집의 「귀염둥이」가 일반적으로 가졌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비춰 익근선조는 본인 스스로가 당대에 가졌던 벼슬과 그 업적을  인정받아 사후에 추증벼슬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적 개념의 「훈장」보다 그 가치나 격이 높았던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익근선조가 사천에 자리 잡게 된 계기는 「벼슬자리」에 있었다는 것으로 그 형체가 잡히지 않는가. 
벼슬을 갖지 않았는데 추증벼슬이 있겠는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벼슬자리는 사천현청과 관계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천의 경우는 또 하나의 벼슬자리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정부가 거둬들인 조곡을 보관 관리하면서 중앙으로 실어 보냈던「조창」(漕倉)이라는 정부기관이다. 6조(曺)중 호조(戶曹) 소속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세 징수업무를 담당했던 정부기관이다.

조창은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인근 각지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 보리, 콩, 조와 같은 세곡을 보관했던 창고였다. 세곡 징수업무도 겸했다.  

이 조창은 경상도 사천의 통양창(通陽倉), 마산의 석두창(石頭倉)을 비롯, 전라도 6개창, 충청도 3개창, 강원도 및 황해도 각 1개창 등 13개창이 있었다.  대부분 평야지대를 안은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평야지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해상교통수단인 조운선(漕運船)으로 수도였던 개성 또는 한양까지 실으나르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다를 품고 있는 사천은 당시 평야지대(현재의 비행장 포함)였고, 진주, 하동 등 인근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모으는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목사(牧使)가 있었던 진주성에는 중앙지원군이 없었지만, 현감이 있었던 사천성에는 지원군이 파견됐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세곡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통양창이 현재의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에 있었던 것이다.
구호리는 옛날에 “조창”(漕倉) 또는 “개창”(開倉) 으로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구호리 앞바다는 조운선이 드나들 정도로 깊었었고, 남해 바다에서 밀려 오는 파도나 태풍을 막을 수 있는 최적지였다.
뿐아니라 당시 남해안을 무대로 날뛰던 해적들이나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아낼 수 있는 포구이기도 했다.

이 구호리 일대는 일찍이 경주鄭氏 문헌공파 후손들이 모여 살았던 하나의 집성촌이었다. 그런데 이 구호리는 지형적으로 보아 평야지대가 아닐뿐아니라 어촌으로서의 기능도 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렇다면 농경시대였던 당시 우리 선대가 뭣을 보고 이곳에 자리 잡고, 집성촌을 이루게 됐을까?

익근선조는 조창 운영에 따른 종사자의 일원으로 당시는 건너기가 쉽지 않았던 섬진강을 넘어 사천지역에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종사자 가운데는 최고 책임자에서부터 세곡 징수 등 관리자 또는 상,하역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익근선조의 추증 벼슬에 비춰 종사자 가운데서도 조창을 운영하는 관리직으로 종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총책 또는 부총책급의 벼슬을 지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추증 벼슬이 호조(戶曹) 관할의 호조참의였다.

또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당시 구호리 집성촌의 선조들이 부유하게 살았다는 점도 주목해 볼 부문이다.

시대 상황에 비춰 관리자급 이상의 높은 벼슬이 아니고서는 그 후손들이나 일가 친척들이 부유하게 살았겠는가.
당시에는 높은 벼슬의 관직자가 일가친척들을 돌보는 것이 임무의 하나였고, 또 당연시 되던 시대였다.
단순히 상,하역부나 하급직이었다면 인근의 전라도에도 영광군의 부용창, 무안군의 해릉창, 영암군의 장흥창 등에 종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익근선조는 말년에 구호리 앞바다 건너편의 사천시 사남면 초전리(현재는 산업단지로 바뀌어 평야로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에 터전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언선선조가 초전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부인  전주李씨 역시 초전리에 묘소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구호리 앞바다 건너편이 초전리다. (4∼5Km거리)
말년에도 조창과의 끈을 놓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곁들여 하동지역에 터전을 잡았던 익근선조의 형 익권선조도 그 일대에서 조곡을 거둬들이는 업무에 종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연관해석을 해 보기도 한다.  아무튼 여기에 모두 기술할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에 비춰 이 가설(假說)을 정설(定說)로 이해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필자의 판단(?)이다.

사천지역에 첫발을 내디딘 익근선조 부문에 관해 필자 나름대로 수집 검토한 자료를 토대로 유추한 것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판단」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세곡창고에 관한 부문은 역사기록에도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세금에 관한 부문이었던 만치 조선 멸망후 백성들에 의해 그 흔적이 쉽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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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 나타난 양반
 
조창을 연결고리고 하여 익근선조의 위상이 어느 정도 였을가를 생각 해오던 어느날 필자는 이에 관계된다고 생각되는 꿈을 꾼적이 있다. (꿈은 길어야  4∼5초라 하지 않던가.)

조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여기에는 주막 등(燈)이 걸려있는 주막이 있었다. 사네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수레를 끌고 온 황소들의 되새김질 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 가운데 머리에 흰 무명수건을 동여맨 가마꾼 2명이 앞뒤로 가마를 메고 이쪽으로 오지 않는가.
그 가마 속에는 뚜렷하지는 않지만 갓을 쓴 한 양반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가마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마와 달리 원두막 형식의 둥근 지붕에 사방이 트여있었고, 자리에는 볏짚 멍석이 깔려 있었다.  순간적으로 가마의 형상은 사라지고 둥근 지붕의 원두막에 앉은 그 양반은 길을 재촉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보는 순간 잠이 깨었다. 

너무 깊이 생각해온 환상의 일부였을까. 아니면 조상의 영(靈)이나 혼(魂)이 있다는 증거일까. 잠이 깬 후 가마부문이 선명해 지는 것은...?

2010년 6월 경주정씨 문헌공파 69세손 鄭亨來(賢均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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