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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보서 역문 (乙未譜序 譯文 14권보  1955년)

 

무릇 족보는 무엇하는 것인가?
족보라는 것은 세계를 글로 적어 시조및 선조의 전통을 잇고 종족에 미쳐 그 친진(親盡)된 일가의 친목을 도모함이니 하물며 그 지극히 가까운 일가랴?  이와 같을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조상없는 사람은 없는데 그 조상의 조상됨을 알지 못하면 이는 조상이 없는 것이고 또 일가가 없는 사람이 없는데 그 일가의 일가됨을 알지 못하면 이는 일가가 없는 것이다.  일가가 없고 조상이 없는데 사람이라 말하면 가한가?   그것은 가치 못할 것이다.

이때문에 정자(程子)는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하려면 반드시 보계를 밝혀야 된다" 말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족보가 폐지되면 사람의집이 내려온 곳을 알지 못해 오래된 가정이 없고 골육(骨肉)이 질서가 없어 아무리 친한 일가라 도 정의가 박하게 된다." 하시니 이점은 백세에 증거해도 잘못이 없고 후인을 기다려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우리집의 내력이 멀다.  옛날 진한(辰韓) 때에 하늘이 화산에 신인을 탄생시키어 자산진지부의 장이되니 바로 육부장의 한 분이다.  신라 초에 좌명공신으로 왕실을 도와 백성을 예로 가르치고 백성의 잘못을 금하여 신비스럽게 교화시켜 윤리가 밝아졌다.  그러므로 낙랑후의 봉호를 받으니 바로 비조 지백호이다.  현손(玄孫)인 동충이 유리왕 9년 임진(壬辰 서기 32년) 봄에 성을 정(鄭)으로 받으니 사적이 동사(東史)에 실려있다.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동안 이름난 공과 큰 경이 대대로 계속되어 당세의 갑족이라 말할 만하고 연일 동래 온양 초계 하동의 모든 정씨가 낙랑후의 후손이 아니 것이 없다.

조선조에 이르러 훈업(勳業)으로는 양경공 희계와 제안공 효상같은 분이 있었고 유일(遺逸)로는 지평공 홍업같은 분이 있었고 도학(道學)으로는 추만공 지운과 묵제공 언충같은 분이 있었고 절의(節義)로는 충렬공 인조 노송정공 지년 죽사공 구 옥계공 승복 충장공 발같은 분이 있었고 그 밖에도 정충과 지효와 달관과 현직이 표표하게 불후(不朽)의 이름을 세워 냇물이 흘러 쉬지 않는것 같고 일월의 행함이 대명한 것 같으니작하고 술하여 덕을 높이고 업을 넓힘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에 참여 하겠는가?  그러나 지난 수천년 동안에 난리가 가끔 가끔 있어 구보의 유적이 여러번 실전 되었으나 다행히 이같은 전함은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

지난 숙종 40년갑오(甲午 1714년)에 월성군의 12대손인 휘 두일 호 수헌공이 있어 근심이 깊고 염려가 멀어 고금을 참작해 이적을 모아 문정공의 가서(家緖)를 기록하고 일가를 모아 소목을 차례대로 적고 친친의 도를 법으로 삼아 깊이 심력을 쏟아 드디어 25년의 긴 세월이 걸려 분명한 세권의 책을 이룩하니 군자가 이같지 않고 일찍이 명예를 얻는 사람 있지 않다.  그 뒤 임자보 갑오보 경오보 갑인 대동보가 또 계속 해 이룩 되었고 그 사이에 각각 파보를 만든 것이 또한 많다

아! 천지가 닫히고 현인이 숨어 교화가 밝지 못하고 윤리가 무너져 동서남북에 풍운이 급박하고 오랑캐의 군대가 쳐들어와 골육이 서로 살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난리가 조금 진정되었으나 난리가 완전히 평정되지 못하니 어찌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겠는가?   진실로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히 할 때이다.

이에 계사년(癸巳년 1953년) 10월 15일에 옥계선조의 시제를 올린 뒤 대동보를 하자는 의논이 있어 전체 종인이 일치되어 고무하여 동성으로 책려하고 제력(齊力)으로 원근의 구분없이 모든 일가를 모아 분리와 존망의 다소가 증거를 얻게 되었고 상계주에 약간의 누락과 착오를 수정하니 무릇 세계(世系)의 수가 74세에 이르고 명단의 수가 3만 여명이 넘으니 세가거족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랴?  편찬의 규모는 지나지도 않고 그릇되지도 않아 삼가 법도를 쫓아 인쇄에 붙여 이에 책이 이룩되니 우리 씨족의 능사가 끝난 셈이다.

망령되게 불문의 솜씨로 다시 한마디 말을 하노니 이제 천하가 애민족은 말해도 애종족은 말하지 않아 다만 조국에는 시조가 있는 것을 알지만 부조(父祖)에는 시조가 있는것을 알지 못하니 이 점이 그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었이랴?  이 때문에 천하후세를 근심하는 것이 성인보다 큰 것이 없고 성인의 도는 친친(親親)보다 큰 것이 없고 친친의 구분은 족보보다 분명한 것이 없으니 족보는 1세라도 불수할 수 없고 도는 1일 이라도 실천하고 준수하지 않을 수 없으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후세의 군자들이여 조상의 유덕을 잇는것이 선이로다.

을미 12월  일
문헌공 27세손 영태(永泰) 삼가 서(序) 함

 

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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