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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보서 역문(壬子譜序 譯文)      후손  두일 서

 

우리 경주정씨의 대서는 멀리 신라 때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는 동안에 명공과 거경과 대부와 장사들이 계속 되었고 종지의 가엽이 널리 퍼져 몇백 몇천이 되는지 모를 정도로 번창하여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씨족이 된지가 오래되었다。

 

계림부원군 양경공께서 조선 태조의 개국순충좌명공신이 되어 위로 뿌리가 깊고 먼것을 생각하고 동방에 성범이 전하지 못함을 슬피여기며 또 형제가 타인과 같이 됨을 염려하여 드디어 아버지 부원군 국헌공(菊軒公 양경공의 아버지인 휘 휘익 아호)의 뜻을이어 세보를 만드는데 위로는 평장사 문정공에서부터 시작하고 아래로는 이조전서 월성군(月城君 문헌공의 아들인 휘 종철의 봉호)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벌열(閥閱 옛날공적을 적어 문에 걸어둔 예문의 왼쪽 기둥을 벌, 오른쪽 기둥을 열 이라함) 공로 절행 표치(標致 취지를 나타내어 보임)등을 기록하고 十여대 동안에 내외자손을 모두 기록하시니 조상을 존경하는 뜻이 참으로 지극하시었다。

월성군은 두일(斗一)의 十二대조로 월성군을 바로 문정공의 六대손이니 여러 일가들의 보계에 상고함에 일치하고 오직 윗대의 세계는 임진왜란때에 보전이 되지 못하였으니 자손의 유한이 어떠하겠는가?

나의 아버지께서 일찍이 가승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시었다。부족한 내가 스스로 생각해보니 사람은 자기의 조상을 꼭 알아야되고 또 나누어진 파를 꼭 알아야 한다。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도인(塗人)에 까지 이르는것이 비록 이세(理勢사리와형세)에 당연한 것이지만 막연히 알지 못하면 그것은 너무도 생각치 못하는 일이다。

좌씨(左氏노나라때좌구명)가 말하기를「소목공 이서주에서 일가를 모았다」하니 뒷골말 하는 사람들은「종법과 치법이 서로 관계 된다」고 말하였다。또 태사공이 옛날 어진사람 군자들의 택후 족성한 사람들을 간추려 세가를 만들었으니 가승의 제도를 옛사람들이 이처럼 숭상 하였던 것이다。수보는 곧 합종의 유법으로 족보는 꼭 만들어야 된다。내가 이러한 뜻에서 서울과 시골을 모두 돌아다니면서 모든 일가들의 흩어져 사는것과 종지의 나눈것등을 모두 모아 기록함에 몇 해가 걸리었다。

숙종 四十一년 갑오(甲午 숙종四○ 一七一四)에 경주에 가서 종로 지화(之華)씨와 더불어 수보의 일을 논하니 종로는 바로 부마(駙馬왕의사위)인 월성위의 후손이다。그 아들 규징(奎徵)을 시켜 옛족보 옛문적을 새로 베끼도록하고 나와 함꼐 여러곳에 사는 많은 일가에게 편지를 보내어 용성부(龍城府 지금의남원) 광한루(廣寒樓전라북도남원에있는 이태조때 황회가 세운것으로 춘향전으로 유명해졌음)로 모이도록하니 이때는 을미(乙未 숙종四一 一七一五)겨울 十월十五일이다。

 

여러 일가들이 모두 모여 각 각 세계를 내놓고 일가의 정을 즐기니 왕씨 난정계(蘭亭契 진의 서성왕의지등 四二명이 난정에 모여 주식을 베풀며 즐긴모임。즉 척강성 소흥현 서남에 있음。)를 진대에서 숭상 하였고 위씨 화수회(花樹會성이 같은 일가끼리 친목을 꾀하기 위하여 이룬 모임)를 이천이 취한것이 모두 이때문이다。

여러 일가들이 모두 말하기를「오늘날 족보일을 주장 할만한 사람이 주장하지 않으면 잘 이룩되기 어렵다」하고 중의가 부족한 이사람을 도유사로 뽑고 구령을 부유사로 뽑고 또 각 각 지방유사를 정하였다。

임진년 봄에 순천 지방의 여러 유사인 태구 휘경 표경 윤경 희경 유호 함씨등과 더불어 고증하여 책을 편찬하고 기중 임중 기중 원고를 작성하여 한질의 족보를 만드는데 三책으로 나누어 내 스스로 편례를 정하지 않고 옛날 보법을 따랐다。

본당에 성자를 쓰지 않는것은 본종을 구별한 것이고 외손은 三세에 그친것은 복잡을 피하기 위한것이고 주에 자세하고 자세치 못한차이가 있는것은 아는대로 기록한 때문이고 류파를 별도로 끝에 붙인것은 세계를 알지 못한 때문이고 그밖에 범례 서문 통장등을 책머리에 기록한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족보의 이루어진 참 뜻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대개 절목의 자세함과 차서의 분명함과 본원의 나옴과 지파의 나눔과 부자의 세와 형제의 행과 대종 소종과 본손 외손 등등이 한번 책을 봄에 쉽게알아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하는 도리를 깨닫게되니 어찌 작은 도움이 없겠는가。

보책의 원고가 이미 완료됨에 간행할 뜻에서 정미(丁未 영조三 一七二七)년에 서울에 올라가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니 일가들이 모두 찬성하고 또 서울에 사는 유수씨는 부원군 양경공의 十一대손으로 양경공의 뜻을 쫓아 보책을 만든지가 오래 되었다。 이에 여러 일가 두장 석장 세장 태장 유씨등과 더불어 함께 통문을 발송하여 여러 일가들에게 알려 북한(北漢서울의 북쪽에 있는산。일명 삼각산 화산화옥)에서 모이도록하니 일이 어지간히 되었다가 끝내 이룩되지 못하였다。

기유(己酉 영조五 一七二九)에 나의 아들 태익이 나의 나이 늙고 일이 성사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관동 함관등지를 거쳐 서울에 이르러 종의가 다시 합하니 아산현감 세장이 또한 양경공의 十二대손으로 정미(丁未 영조三 一七二七)에 일이 이룩되지 못함을 탄식함과 동시에 태익의 정성이 지극함을 가상히여겨 여러도에 통문을 보내 각군에 지방유사를 정해 돈을 거두어 무안 도회소로 보내도록하고 다시 부족한 나를 도유사로 정하여 발간하는일을 보살펴 끝나게하니 세장씨의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 하는뜻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 우리 선조가 덕을 쌓아 집안을 여는 경사가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더 끝이 없어 후손이 몹시 번창한데 보통사람의 정은 일가간에 촌수가 멀어지면 정도 멀어지고 촌수가 더욱 더 멀어지면 정도 더욱 더 멀어져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게되니 이것이 자기의 몸으로 친소를 하고 선조로 친소를 함이아니다。

후손들이 이책을 보는 사람은 능히 선조의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하고 자기의 원근으로 친소를 하지 않으면 효제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 돈목의 가풍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것이다。

 

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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