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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림군 휘 년 기적비문 역문( 譯文)    후손동휘찬


일은 국가를 어지럽힘보다 급박한것이 없기 때문에 어지럽힘을 그치게 함이 충(忠)이 되고  역(逆)은 임금을 죽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시역(弑逆)을 베임이 의(義)가 된다。


 신라 千년 동안에 패부(覇夫뛰어난인물)와 열사(烈士의를위하여죽은사람)들이 참으로 빈빈(彬彬많은모양)하게 많지
만 오직 위에서 말한 급박한 일을 당해 큰 시역의 인물을 베어잡은 의리가 당당하고 이행한 충성이 혁혁하여 국가로 하여금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영구히 편안한 곳으로 나가도록한 분은 오직 우리 시림군(始林君)정공 이로다。

 

희강왕(禧康王) 三년( 오八三八) 정월에 김명이 다른뜻을 품고 시중인 이홍(利弘)등과 더불어 군을 충동시켜 난을 일으켜 왕의 수족들을 모두 죽이고 계속해 희강왕을 핍박해 목매 죽도록하고 스스로 서서 왕망(王莽)처럼 왕이 되니 신라 사직(社稷)의 위태함은 돗대를 잃은 배와 같이 되었다。

 

이때 시림군이 당나라로 부터 귀국해 청해진(淸海鎭지금의완도)에 이르되 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와 더불어 잔치를 벌여 술을 마셨는데 잔치가 끝나기 전에 희강왕이 시해(弑害) 되었다는 소식이 경주로 부터 전해왔다。장대사는 자기의 군대 五천명을 나누어 시림군에게 주고 인하여 손을 잡고 말하기를「자네가 아니면 이 난리를 평정할 수 없다」하니 이것은 바로 곽분양(郭汾陽곽자의를말함)과 이임회(李臨淮이광필을말함)가서로 충의로 권면한 일과 같은데 무예를 말하면 시림군과 장대사의 차이가 안자와 자공의 같지 않음과 비슷하였다。

 

시림군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進擊)하니 그형세는 불을켜서 쑥을 태우고 바닷물을 기우려 숫불을 끄는것과 같으니 어느 역적인들 베이지 못하며 어느 난리인들 평정치 못하랴?  시림군이 개선함에 신무왕이 시림군의 사직을 편안히 함과 장대사의 인재(人材) 알아본 것을 장하게 생각해 시림군에게 대사의 벼슬을 이어 받도록하고 장대사에게는 정승을 임명하니 대개 충을 갚고 의를 포양(褒揚) 함에서 나온 것으로 시림군이 청해진에 부임함에 군의 위엄이 더욱 진작되어 사나운 해적들이 다시 침범치 못하였다。

 

아! 옛날에 왕손가(王孫賈)가 뇨치(榧齒)를 베인일을 누가 홀로 아름답다 말하랴?  대개 이러한 사적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부분으로 아직도 화려하니 진실로 비석을 세우지 않아도 비를 세운것이나 다름없다。그러나 그윽히 살펴 보니 옛사람의 위대한 사적이 사기(史記)에 있다해서 비를 세우지 않는것이 아니니 어찌 시림군에게만 그렇치 않을 수 있으랴?  또 더군다나 시림군의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의 추원(追遠)의 정성을 표 할곳이 없으니 시림군의 충과 의를 경모(敬慕)하는 처지에서 사실로 비석을 세우지 말고저해도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팔도에 사는 시림군의 후손들이 완도읍 서쪽 장도위에 나가 시림군의 사적을 비석에 새겨 길이 후세에 알리고져 하니 대개 완도(莞島)는 옛날 청해진의 땅이고 청해진이 시림군에 있어서는 교지(交趾지명地名)가 복파(伏波마원을일컬음)에 대한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장차 일을 시작함에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내가 어찌 이일을 가망하랴?  그러나 일이 선조를 천양함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끝내 감당하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안으로는 우리 집안의 문적을 상고하고 밖으로는 국사를 참고해 후세에 길이 전할 만한것을 기록 하노니 혹 내가 선조에게 아당 하였다고 말하지 않을는지…?

 

공의 성은 정씨요 이름은 년(年)이니 낙랑후 지배호의 후손으로 성품이 충의에 돈독 하였고 또 무덕(武德)을 겸 하였으며 특별히 잠수(潛水)에 특기가 있어 능히 五十리를 헤엄쳐도 숨이 가쁘지 않았다。

 

벼슬함에 이척손(伊尺飡)에 이르렀고 당나라에 들어가 무령군(武寧軍)에 배치되어 장보고와 함께 소장(少將)이 되었는데 창을 사용함은 누구도 상대자가 없을 정도였다。 벼슬을 버리고 고국에 돌아와 위에서 말한 역적을 베이고 난리를 평정하는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시림군의 충성이 삼한(三韓)에 제일이라 칭 하였다。

 

신무왕기미(己未신무一八三九)에 대아손(大阿飡)이 되었고 문성왕 경신(庚申문성一八四十)에 대가간(大角干)이 되어 시림군에 봉해 졌는데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와 산소는 이제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아내 김씨(金氏)는 아손(阿飡)인  균정(均貞)의 딸이고 아들 문(文)과 손자 목(穆)은 모두 이척손(伊尺飡)으로 능히 조상의 유업을 이어 떨구지 않았다。


당서(唐書)를 보면 공과 장공(張公)으로 이임회와 곽분양에 비교하였는데 사관(史官)의 칭찬이 난을 평정한 시림군에게는 없고 군대를 나누어준 장공에게만 있으니 사마공(司馬公사마광을일컬음)의 위(魏)나라에게 정통(正統)을 준 실수가 어찌 이렇게 많은가?  그러나 지난 일이라 족히 말할것이 없도다。 다만 오늘에서 양의 사설(邪說)이 하늘에 닿아 팔도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어져서 세상은 난(亂) 아닌 난으로 들어가고 일은 역(逆) 아닌 역이 많아 충의의 성품을 간직한 사람들이 벌써 부터 시림군에 대해 기구속백(起九贖百죽은사람을살려낼수만있다면자기의몸을죽여서라도살린다는말)의소원이 간절 하였더니 다행히 이러한 때에 시림군의 천고(千古)에 드문 충과 만세에 없는 의가 앞으로 이 빗돌에 힘입어 천하에 알려져 빛나게 되면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즈음에 어찌 혼탁한 세상을 밝게하고 술취한 듯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효과가 없으랴?   내가 앞으로 눈을 씻고 기다리노라。

 

 

출처:  경주정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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