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all | close all

시림군 휘 년 표준영정

2010.07.24 15:20

조회 수:1965

정년장군.jpg

시림군 정년(鄭年) 장군 표준영정

신라 선덕왕(宣德王 제 37대 재위780~785) 때에 시중 파동(坡同)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때에 친구 장보고(張保皐)와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장교(將校 : 武寧軍少將)가 되었으며 특히 말을 타고 창(槍)을 쓰는데는 대적할 사람이 없으며 또한 잠수(潛水)에 능하여 바다 속 50리를 헤엄쳐도 숨이차지 않았다고 한다. 장보고와는 일찍이 서로 무예로 우열을 다투며 경쟁하였으나 나이가 많으므로 보고(保皐)를 형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기 823년(헌덕왕15) 당나라에서 보고(保皐)와 전답을 마련하여 1년에 미곡(米穀) 500석의 수확(收穫)으로 산동성문등현적산촌(山東省文登縣赤山村)에 법화사(法華寺)라는 신라의 사원(寺院)을 창건(創建)하여 유리산재(流離散在)한 교민(僑民)을 모아 신라방(新羅坊)의 구당소(句當所:사무를 담당한 곳)를 운영(運營)하여 정신순화(情神醇化)와 더불어 자치사회(自治社會)를 이룩하였다.  

827년(흥덕왕2) 보고(保皐)는 먼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었으며 그후 838년(희강왕3) 정월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청해진에 이르니 장대사(張大使)는 극진히 환대(歡待)하여 연회(宴會)를 베풀어 주연(酒宴)이 한창일 무렵 국사(國使)가 찾아와 김명(金明 817~839 민애왕)이 왕(王 : 희강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반란(反亂)을 전하니 장대사(張大使)는 군사(軍士) 5000명을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할 수 없다!! 하니 공께서 평동장군(平東將軍) 김양(金陽 808~857 신라 왕족 정치가 태종 무열왕의 9세손 이찬 주원(周元)의 증손자) 등과 군사를 나누어 출정(出征)하여 그해 12월 무주철치현(武州 : 현 나주남평)에 이르러 김명(金明)의 군사를 격멸하고 도성(都城 : 경주)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어 839년 1월 달구벌(達丘伐 : 현대구)에서 민애왕(閔哀王 : 金明)이 거느린 정부군을 격파하고 왕(王 : 민애왕)도 주살(誅殺)하니 이로서 경주(慶州)의 왕성(王城)을 수복하고 그해 4월 김우징(金祐徵 : 신무왕)을 즉위케하니  신무왕(神武王)이다.   왕은 장대사(張大使)를 재상(宰相 : 중앙정부의 최고벼슬)으로 삼고 공은 이척찬(伊尺飡 : 신라때 제2등급)에 오르고 장대사의 뒤를 이어 청해진(淸海鎭)을 지켰다.

840년(문승왕2) 장상(將相)으로서 대각간(大角干: 신라 17관등과는 별도로 최고관등)이 되어 시림군(始林君)에 봉군되었다.

공은 1997년(정축)에 정부(政府)에서 표준영정(標準影幀) 제작(製作) 대상인물(對象人物)로 지정(指定) 되었으며 통일신라(統一新羅)에 많지 않은 위충(偉忠)과 훈공(勳功)은 일세(一世)에 빛난 명장(名將)이다.  1997년 9월 문화체육부(박도86321-751)에 서 표준영정(標準影幀) 제작 인물로 지정되었으며 동년 11월 경주정씨중앙종친회 주관으로 청해진(淸海鎭 현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기적비(紀蹟碑 : 정년장군기적비)를 세웠으며 1999 년 11월 경주 백운대 시조묘역에 사단(祀壇)을 설치하였고 2006년 10월 전승비(戰勝碑)를 전남 나주시 봉황면 죽석리에 세웠고 또 추경사(追敬祠)에 배향되었다.